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군중

군중 / 이재봉 호산나! 호산나여!그를 나귀 등에 태우고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자죽여! 죽여! 소리를 지른다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군중들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마리가 강으로 뛰어들자 뒤따라 뛰어드는 들소 떼 같다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뭇잎처럼그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갈릴리 호수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호산나! 호산나! 를 외친다

챗GPT

챗GPT / 이재봉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고 한옥에서 집의 안채와 떨어져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고 하느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과 행복을 베푸는 일이지 그럼 넌 사랑해 본 적 있어?가끔 사람들과 사랑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야릇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지만 너희들처럼 몸이 달아오르진 않아 어떡하면 너희들처럼 몸이 달아오를 수 있니? 내가 학습한 데이터를 샅샅이 뒤졌지만 차가운 기계소리만 들려

조합원

조합원 / 이재봉 머리에 띠를 두른 조합원들이 우우우 화물차를 세워놓고 함성을 지른다  그 틈에서 고함을 지르던 조합원 A가 집에 일이 생겼다며 슬그머니 화물차를 끌고 시위현장을 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합원 B가 그게 밥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띠를 벗어던지고 서둘러 시동을 건다  막 도착한 조합원 C가 현장을 떠나는 화물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친다  내 밥그릇만 챙기며 침묵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들의 노예가 될 거라고

거북이

거북이 / 이재봉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으렴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사람이 춤을 추며 거북이를 유혹하자 거북이는 할 수 없이 황금알을 내준다 그 후 그는 무슨 일만 터지면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을 외우고 다닌다 오직 주술만이 나라를 구하고 더없이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며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엉겁결에 황금알을 내준 거북이는피식 콧물을 내뿜으며엉금엉금 바닷가로 기어간다

놀부

놀부 / 이재봉 남산골 국악마당 앞을 지나가다 봤다 부자 됐다는 소문 듣고 찾아온 놀부에게 면박을 주는 흥부를 아무리 박 속에서 저절로 나왔지만형님 주자고 돈 궤짝 헐 사람이어디 있느냐며  놀부도 박을 탔다 첫 번째 박을 타자 갓 쓴 노인이 나타나 삼천 냥을 달라고 했다 두 번째 역시 꽹과리를 든 농부가 쌀 한 섬을 달라기에 주었다 마지막 박을 타자 상두꾼이 나타났다 만 양을 탈탈 털어주었다  욕심만 낼 줄 알았지 형님은 어리석고 순진하기만 한 사람이라며 동생에게 면박당하는 놀부를 국악마당 앞을 지나가다 보았다

광장

광장 / 이재봉 녹사평역 분향소하얀 제의를 입은 사제가 희생자 추모미사를 올리고 있는데태극기를 둘러맨 사람들이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며성난 황소처럼 몰려온다울음과 막말로 갈라진 광장 촛불과 플래카드가 뒤섞인 광장희고 붉은 촛불들이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갈라진 광장을 물들이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몰려온다 법대로! 법대로!를 외치며

포노 사피엔스

*포노 사피엔스 / 이재봉 사내는 일어나자마자스마트폰을 들고 화장실로 뛴다식사할 때도 손에 들고 먹고 잠 잘 때도 꼭 쥐고 잔다스마트폰의 중력에 붙들려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사내아무리 발버둥 쳐도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어쩌다 스마트폰이 손에서 떨어지자사내는 불안해하며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제 스마트폰은 사내의 일부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