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우주의 소리

우주의 소리 / 이재봉 나비가 나를 실고 숲속으로 날아간다 번뇌 다함이 없지만 끊으리라 잠자리가 나를 바라보며 비껴간다 번뇌 다함이 없지만 끊으리라 매미가 맴맴맴 몸통을 떨며 소리를 낸다번뇌 다함이 없지만 끊으리라 쇠박새가 찌르르르 참나무 가지를 흔든다번뇌 다함이 없지만 끊으리라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번뇌 다함이 없지만 끊으리라 우주가 숨을 쉬며 말을 한다맴맴맴 찌르르르

숫자에 대한 강박

숫자에 대한 강박 / 이재봉 은행 대기실에서 번호표를 뽑았다4자가 찍혀있었다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 번호표를 버리고조금 있다가 다시 뽑았다 은행에서 나와 친구 사무실로 향했다 친구 사무실은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후 4층 버튼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4자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4자 위에 F자가 붙어 있었다 4자가 나를 불안케 한다친구 사무실을 나온 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왔다

뉴노멀

뉴노멀 / 이재봉 초로의 노인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청군 백군 편을 지어 릴레이 경주를 한다 흰 모자를 쓴 노인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다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순간 서로 부딪혀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안 돼안 돼 혼자 달릴 때는 빨리 달려도 되지만여럿이 달릴 때는 안전하게 달려야 해앞뒤 바라보며 백군들이 흰 모자를 내 던지며 소리 지르는 사이 뒤따라오던 청군이 추월을 한다

일그러진 우상

일그러진 우상 / 이재봉 한때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내가 미학에 심취해 있을 때 그의 시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주었고내가 사회 정의를 입으로만 떠들어댔을 때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사람이라는 걸외로울 땐 술 한 잔 마시며 욕망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이제 그는 갔다내게 절망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그는 떠났지만  나는 알고 있다좌절하고 실망한 마음은또 다른 우상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걸 우상을 간절히 원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옷 / 이재봉 옷이 나를 입고 외출을 한다옷은 길거리 사람들을 스캔하며쇼핑몰에 들어가 새 옷을 산다옷은 타인에게 비쳐질 모습을 의식하며 안심시켜 줄 순간을 찾는다 어떤 사람에게 옷은 육체의 피난처이고또 다른 사람에게는 욕망의 승화이다그들에게 옷은 신분의 상징물이며자기 존재의 증명서이다옷은 날마다 차림새를 바꾸어가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옷이 나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옷은 다시 옷장을 뒤지며 내일 입을 옷을 찾고 있는데이젠 드라이클리닝도 먹지 않는 낡은 양복 한 벌이 구석에 걸려있다첫 시집을 내던 날 입었던 그 옷이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 이재봉 벼락 맞아 기운 탑을 수리하다가 오래된 흑백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웬 낯선 여자가 서동과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선화공주는 분명 아니었다가짜 뉴스까지 퍼트리며 서동이 꾀어내고 어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까지 한 선화 마를 캐며 가난하게 살던 서동 왕이 되더니 선화를 버리고 사비성의 부잣집 딸과 또다시 결혼을 했단 말인가  마땅히 벼락을 맞아야지조강지처를 버린 죄 아내를 능멸한 죄탑이 그냥 벼락 맞을 리 없어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머니

어머니 / 이재봉 외줄에 매단 도르래를 붙잡고도하(渡河) 준비를 하고 있는데발밑으로 시퍼런 강물이 보였다무서워 덜덜 떨고 있자 옆에 있던 조교가 큰소리로 누가 제일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머니! 하고 외쳤다뒤 따르던 훈련병들도 한결같이 어머니를 외치며 강을 건넜다두렵고 무서울 때면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외친다

봄봄

봄봄 / 이재봉 기별도 없이 찾아온 산수유가 양지바른 언덕 위에 서서 툭 튀어나온 눈알을 뒤룩거린다  뒤따라 온 매화가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자 실바람을 몰고달려온 개나리가 시샘을 한다 혼자서 외롭게 걸어온 하얀 목련이 개나리 옆에 함초롬히 서 있고 건들거리며 도착한 진달래가 얼굴에 연분홍 미소를 띠며 앉아있다  벚꽃이 구름처럼 밀려오자 마침내 연둣빛 산자락이 희부옇게 출렁거린다 봄이 온다 노랑분홍 꽃을 들고 먼 데서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