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흔적 / 이재봉 모래 위를 걷는다높은 파도가 모래성을 삼키고사랑이 물거품 되어 사라져도나는 모래 위를 걷는다발자국을 남기며 세월은 가도 흔적은 남는 것 붉은 바다가 태양을 삼키고저녁별이 바다 위에 떨어져나를 멀리 싣고 간다 해도모래 위의 발자국은파도와 물거품 사이로영원히 남으리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3.08.21
사진첩 사진첩 / 이재봉 어머니가 사진첩을 꺼내놓고 가위로 사진을 자르고 있다빙그레 웃고 있는 젊은 날의 웃음이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몇 달 전의 눈빛이 사각사각 잘려나간다당신이 떠나고 나면 자식들이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릴까 봐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사진마저자식을 위해 버리고 또 버린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3.06.23
사잣밥 사잣밥 / 이재봉 어머니의 밥그릇엔 항상 밥이 남아있었다식사를 하실 때마다 밥 한 숟갈을 남겨놓곤 하셨다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삼우제날어머니 무덤에 어머니가 남겨 놓은 사잣밥을 가득 차려놓았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3.05.31
함박꽃 함박꽃 / 이재봉 어머니를 추모공원에 남겨두고 서글피 내려오는데 서쪽 하늘에서 희푸른 연기가 뭉글뭉글 솟아오르다가 이내 사라진다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뽀얀 구름이 함박송이처럼 피어있다 나는 함박송이를 꺾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나뭇가지엔 어머니가 함빡 웃으며 앉아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3.05.11
성탄절의 추억 성탄절의 추억 / 이재봉 산타가 오면 모른 척해야지 눈을 감고 잠든 척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크레파스를 들고 오셨다 너무 좋아서 방싯 웃는 사이 양쪽 볼이 빨간 아버지가 소리 없이 나가신다 휘휘 날리는 눈발을 헤치고 크레파스를 들고 오시느라 빨갛게 언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12.29
화목제로 오신 예수 화목제로 오신 예수 / 이재봉 예수님은 그냥 오시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죄인 대신 속죄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 곁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어린양이 되시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화목제로 오셨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12.25
나무꾼 나무꾼 / 이재봉 산행 길에서 만난 노인 나무를 동으로 지고 지게꼭지를 끄떡거리며 내려간다 그 많은 나무를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가느냐고 묻자 “내가 죽으면 아내가 추운 방에서 덜덜 떨까 봐 미리 땔감을 준비하는 거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젖은 단풍잎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진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11.29
처서 처서 / 이재봉 모기가 처서비를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톱을 든 귀뚜라미를 만났습니다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왜 톱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귀뚜라미는 긴긴밤 독수공방에서 임을 기다리는 처자의 애를 끊으려 톱을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벽녘 빗소리에 문득 눈을 뜨니 쓰륵쓰륵 어디선가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애끊는 톱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9.01
에덴농원 에덴농원 / 이재봉 누런 보리밭 길을 걸어가는데 ‘에덴농원’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길을 가는 농부에게 에덴농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여기라며 보리밭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아담의 자손들이 묻힌 그곳에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스며들어 에덴의 땅이 된 것일까 생명수가 넘실대는 에덴농원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데 누런 물결은 금빛 노을이 되어 서쪽 하늘에 떠있고 농원은 다시 어두운 무덤으로 변한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6.21
지독한 사랑 지독한 사랑 / 이재봉 여보세요? 에미다 그래 밥은 먹었어? 빈속에 약을 먹으면 속이 상한단다 입맛이 없더라도 꼭 챙겨 먹어라 지난번에 보내 준 멸치는 다 먹었니? 또 보낼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뒤뜰에는 노랗게 핀 민들레가 지천으로 널려 있더구나 연한 것들을 골라 김치를 담가 줄까? 잠은 잘 자지? 똥도 잘 싸고? 책만 보지 말고 운동도 좀 해라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더 처진다 내일 또 전화하마 뚝.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