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1

화목제로 오신 예수

화목제로 오신 예수 / 이재봉 예수님은 그냥 오시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죄인 대신 속죄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 곁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어린양이 되시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화목제로 오셨다

나무꾼

나무꾼 / 이재봉 산행 길에서 만난 노인 나무를 동으로 지고 지게꼭지를 끄떡거리며 내려간다 그 많은 나무를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가느냐고 묻자 “내가 죽으면 아내가 추운 방에서 덜덜 떨까 봐 미리 땔감을 준비하는 거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젖은 단풍잎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진다

처서

처서 / 이재봉 모기가 처서비를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톱을 든 귀뚜라미를 만났습니다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왜 톱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귀뚜라미는 긴긴밤 독수공방에서 임을 기다리는 처자의 애를 끊으려 톱을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벽녘 빗소리에 문득 눈을 뜨니 쓰륵쓰륵 어디선가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애끊는 톱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에덴농원

에덴농원 / 이재봉 누런 보리밭 길을 걸어가는데 ‘에덴농원’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길을 가는 농부에게 에덴농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여기라며 보리밭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아담의 자손들이 묻힌 그곳에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스며들어 에덴의 땅이 된 것일까 생명수가 넘실대는 에덴농원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데 누런 물결은 금빛 노을이 되어 서쪽 하늘에 떠있고 농원은 다시 어두운 무덤으로 변한다

지독한 사랑

지독한 사랑 / 이재봉 여보세요? 에미다 그래 밥은 먹었어? 빈속에 약을 먹으면 속이 상한단다 입맛이 없더라도 꼭 챙겨 먹어라 지난번에 보내 준 멸치는 다 먹었니? 또 보낼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뒤뜰에는 노랗게 핀 민들레가 지천으로 널려 있더구나 연한 것들을 골라 김치를 담가 줄까? 잠은 잘 자지? 똥도 잘 싸고? 책만 보지 말고 운동도 좀 해라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더 처진다 내일 또 전화하마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