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나팔꽃 / 이재봉 나팔꽃이 없어졌어요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아내가 아침에 피었던 나팔꽃이 없어졌다며 한참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초가을 한낮 나팔꽃은 오후 내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새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다음날 아침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꽃 하나가 벽을 타고 올라오다 사들사들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무슨 말을 하려는 듯 나팔처럼 입술을 길쭉이 내밀며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2.09.21
우화 우화 / 이재봉 숲 속을 걷고 있는데호랑나비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른다땅에서 한생을 벌레로 살다가 몸에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호랑나비폈다 접었다 햇볕에 날개를 말리며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내려오는데나비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온다 방금 허물을 벗었는지날개를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마을 앞까지 따라오다가훨훨 은사시나무 위로 날아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2.08.07
호접몽 호접몽 / 이재봉 흰 나방 날고별들이 반짝이는 호숫가에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데자물자물 낚시찌가 움직인다재빨리 낚싯줄을 감아올리자 은빛 물고기가 올라온다잡은 물고기를 바구니에 넣으며잠시 생각을 하고 있는데순식간에 나방이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나를 데리고 유유히 날아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포노사피엔스 2022.08.01
인연 인연 / 이재봉 미워하면 다음 생에다시 만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움이서로를 끌어당기는 연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돌멩이 하나를 만드는데도수억 년이 걸렸는데인간이 인연을 만드는데 한생만 쓰기에는 너무 짧지 않은가 우리에게다음 생이 있어야하는 이유가바로 이 때문이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2.05.21
타로 타로 / 이재봉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날아내와 다투고 강남역 근처를 지나가는데타로마스터가 콧노래를 부르며자주색 벨벳 위로 카드를 내민다 자리에 앉아 카드를 뽑아 들자 한 여성이 꽃을 들고 호숫가에 앉아 있다 한쪽 발은 호수에 담그고 있고 한쪽 발은 땅에 디디고 있다 점집을 나오면서 카드의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꽃무늬 모자를 쓴 여자가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며 걸어간다 나는 운명(雲命)을 거부하지 못하고 구름 따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포노사피엔스 2022.05.01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 이재봉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입춘이 지나고 비가 내린 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해야 봄은 온다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겨울을 건너뛰고 봄은 오지 않는다 꽃들도 저마다 피는 순서가 있다아무리 날이 더워도개나리꽃이 피고 나야 장미꽃이 핀다빨리 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2.04.27
유리문 유리문 / 이재봉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어급하게 회전문을 밀고 나가다가 유리에 이마를 부딪쳤다눈에 불이 나면서 친구가 둘로 보였다언제부턴가 유리문은 시야를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눈빛이 유리를 통과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사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킨다투명한 것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유리문이 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2.03.21
동안거 동안거 / 이재봉 묵언수행 중이던 스님이 수행을 하다 말고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화두를 붙잡고 번뇌의 바다를 건너다 그만 바닷속에 화두를 빠뜨렸나 보다생각을 끊어야 번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말은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대웅전 앞 배롱나무가산새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동안거를 하고 있듯이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2.01.23
격리 격리 / 이재봉 코로나에 감염된 사내 집에서 집으로 출근을 한다 아침마다 팀장에게 눈도장을 찍을 필요도 표정 관리를 할 필요도 없다 점심시간인데도맛 집이 코앞에 있지만 갈 수가 없다 눈앞에 보고 싶은 얼굴이 어른거리고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데도 손가락 하나 만질 수 없다숨을 죽이고 동굴에서 두문불출하며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뎌야 한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포노사피엔스 2022.01.11
행복 행복 / 이재봉 커다란 것을 찾지 마세요행복은 천국처럼 커다랗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작고 소소한 것에 있습니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다가오듯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듯일부러 찾지 않아도 행복은 손에 닿는 곳에 있습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