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17

연애편지

연애편지 / 이재봉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뒤적뒤적 넘겨보는데 중간쯤에 ‘사랑하는 K에게’라는 제목의 연예편지가 있는 게 아닌가 슬며시 내용을 훔쳐보다가 얼굴이 화끈거려 얼른 덮었다 은밀한 단어를 떠올리며 다시 책장을 정리하는데 아내가 덥냐며 냉수를 들고 왔다 나는 생각에 잠기며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은 만날까

오늘은 만날까 / 이재봉 오늘은 만날까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석양처럼 뉘엿뉘엿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저녁별이 나타나 날 부른다 무섭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바라보라고 내일은 만날까 만나면 그럼 무슨 말을 할까 어둡고 좁은 골짜기를 지나 문득 동녘 하늘을 바라보니 새벽별이 나타나 날 부른다 머나먼 길을 떠날 때에는 나를 등대 삼아 가라고

가족

가족 / 이재봉 호스피스병동 임종실에 그녀가 누워 있습니다 복수가 차 배가 볼록 나온 그녀가 두꺼비처럼 누워 있습니다 그녀 옆에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가운데에 수박도 하나 놓여 있고요 젊은 시절 남편이 살림을 거덜 내고 바람까지 피우자 견디다 못해 세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도망간 그녀 이십년 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그녀의 남편이 세 살짜리 아기 엄마가 된 그녀의 딸과 수박을 썰고 있습니다 거친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울컥해지는 여름 밤 세 살배기 손녀가 수박 한 조각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자 야윈 그녀의 눈가에 환한 미소가 퍼집니다

초등학교동창회

초등학교동창회 / 이재봉 종각역을 나와 옛 종로서적 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재봉아! 운동회 때마다 백미터 달리기에서 늘 꼴찌를 하던 근수다 우리는 뒷골목 낯선 장소에 모여 삼만 원씩 회비를 내고 서로 악수를 나누며 이것저것 묻는다 연봉은 얼마나 되니? 아파트는 몇 평이야? 애들은 어느 대학에 다녀? 그래, 나랑 똑같구나 그제야 친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연락처를 알았으니 자주 만나자며 술잔을 비운다

복사꽃

복사꽃 / 이재봉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봤어요 눈부시게 계곡을 물들이고 있는 희고 붉은 꽃무리를 생각나요 당신은 길가에 피어 있는 복사꽃을 보고 낡은 벽지 문양 같다며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당신은 짧은 꽃무늬 치마를 펄렁거리며 날 유혹했지요 어제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알았어요 인생이란 것도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낡은 벽지라는 것을

느티나무

느티나무 / 이재봉 산길을 내려오는데 길바닥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먹고 있었습니다 슬그머니 다람쥐 앞으로 다가가자 은빛 꼬리를 흔들며 느티나무 위로 달아났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옆집 할아버지에게 쫓겨 느티나무로 달아난 적이 있습니다 썩은 느티나무 구멍에 몸을 숨기고 태아처럼 오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멀리서 어머니 날 부르는 소리가 잠속까지 울렸습니다

외로움은 본질이다 - 진시황에게

외로움은 본질이다 / 이재봉 -진시황에게 당신의 능을 구경하다가 봤어요 수천의 병사들을 양 옆에 세워놓고 누워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랬군요 외로움이 싫어서 죽어서도 병사들을 곁에 두고 지내온 거였군요 수천의 병사들을 곁에 두고도 모자라 광대와 악사들까지 불러들인 거였군요 하지만 병사들의 눈빛을 봐요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요 혼자 서서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어요 당신은 죽어서도 깨닫지 못했군요 둘이 있어도 외롭고 셋이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