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탄생 깊은 밤 은하수가 출렁거린다 점점 뜨거워지면서 팽 창 폭 발 수 축 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어린 별이 제자리 찾아 은하를 돌고 있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17.01.23
할아버지 할아버지 / 이재봉 골짜기 은수원 나무숲 사이로 살구나무가 보였다 살구가 먹고 싶었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몰래 살구를 땄다 할아버지가 긴 작대기를 들고 쫓아온다 황급 히 나무에서 내려와 도망갔다 시게를 보니 금요일 오후 두 시다 세 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한 로제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제자리에서 맴 돌았다 몸이 종이처럼 가벼워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05.01.21
아버지 아버지 / 이재봉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갔다 아버지는 얼음처럼 차갑게 앉아서 책만 보고 있었다 오줌이 마려웠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 오줌을 쌌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05.01.21
어머니 어머니 / 이재봉 정지된 시골길을 어머니와 함께 걸었다 얇은 안개를 뚫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던 머리가 긴 여선생이 지나갔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치마 속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05.01.17
나 나 / 이재봉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방패연이 하늘을 날고 하얀 석조 건물이 한강 위에 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마음껏 밟으며 텅 빈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는데 브레이크 패달이 보였다 달리는 자동차에 왜 브레이크가 필요하지 그 때마다 또 다른 내가 내 옆 자리에 앉아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05.01.17
꿈 꿈 / 이재봉 비스트로에서 카페오레를 마셨다 마로니에 잎새 사이로 오페라 하우스의 둥근 기둥이 흔들리고 전원교향곡이 새어 나왔다 오보에 소리가 시냇물 되어 흐르자 나는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었다 사막이었다 시커먼 소말리아 병사들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총을 맞고 죽은 시늉을 하며 모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 내 안으로 들어와 자꾸자꾸 총알을 집어넣었다 제1시집 [사랑풍경]/꿈 2005.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