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당신

당신 / 이재봉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가슴에 불길이 타 올랐습니다불길은 바람처럼 온몸을 휘감았습니다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나를 사랑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린 당신만을 의지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죄 많은 나를 말없이 품어준 당신 나는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당신이 살고 있습니다

불쌍하다는 말

불쌍하다는 말 / 이재봉 그동안 나는 불쌍하다는 말만큼 오만한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쌍하다는 말은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가끔 어머니에게 불쌍하다고 말씀하시는아버지를 보고 알았다입맛이 없다며 국물만 몇 숟갈 뜨다 말아도어쩌다 다리를 살짝만 다박거려도어머니를 안쓰러워하고 가여워하는그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진실한 사랑이었음을아버지를 보고 알았다

자동응답시스템

자동응답시스템 / 이재봉 병원진료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누른 다음 시스템을 쫓아가다 입력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걸었으나 통화량이 많아 연결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쓱히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아내가 냉장고  문이 안 열린다며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렸다  아내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문득 자동응답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스템이 안 되면 두드리세요”

개싸움

개싸움 / 이재봉 주인 따라 산책 나온 개들이공원 한가운데서 싸우고 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다가 지친 개가 도망치자이번에는 개 주인들이 싸운다 그쪽 개가 먼저 달려들었다며 상대방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옳다며 개처럼 물고 늘어지며 싸운다 그 옆에서 물끄러미 개싸움을 보고 있던 개들이 언제 싸웠냐는 듯 한데 어우러져물고 빨며 장난을 친다

우리 동네 원장님

우리 동네 원장님 / 이재봉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주 오던 환자 셋이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원장님은 천사 같아하얗게 웃는 모습이 꼭 천사 같아나는 못 들은 채 지나치며복사꽃이 만발한 창가를 바라보았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말이 없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 그 밑에 절로 길이 생긴다는사마천의 말을 떠올리며

돌담

돌담 / 이재봉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돌담을 넘어 하늘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유년의 돌담 밑에서 비상하는 꿈을 꾸었던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맞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뿌리 뽑힌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나를 지킨 건 돌담이었다 모난 돌과 뾰족한 돌이 서로 어우러져 단단한 돌담을 만들었듯이 삶의 시련과 고통이 나를 굳건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