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기 백설기 / 이재봉 때 이른 겨울 철새가 밤새 울어대더니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아직 눈송이를 맺지 못한 가벼운 가루눈이 폴랑폴랑 나부낀다 새들은 알고 있었다떡가루 같은 가루눈이 내리면겨울이 빨리 오고추위가 거세진다는 것을 철새 한 마리가 기척도 없이 내 손등에 내려앉아 올 겨울은 몹시 춥다며느릿느릿 남쪽으로 날아간다 따스한 백설기를 흩날리며 최근에 쓴 시 2024.11.29
은밀한 만찬 은밀한 만찬 / 이재봉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뭐가 그리 잠을 깨운 걸까살금살금 부엌에 가보니풀벌레들이 식탁위에 널브러진식빵을 먹고 있다 식빵 조각을 다시 올려놓자배를 통통거리며은밀한 만찬을 즐긴다 창틈을 보니 풀벌레 한 마리가주린 배를 움켜잡고올 겨울도 굶지 않게 해달라며 소신공양을 올린다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는데매운바람이 눈시울을 적시며 소리 없이 지나간다 최근에 쓴 시 2024.11.21
혼잣말 혼잣말 / 이재봉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던 어머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신다 아들만 다섯 두신 어머니주말이면 자식들이 찾아오지만 입을 봉하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볼 뿐집안 곳곳엔 혼잣말만 가득하다 말을 하고 싶었다 어머니, 사랑한다고저녁이 오기 전, 그 말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망설이는 사이 오십 년이 지나고못 다한 말은 입안에 남아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혓바늘로 돋아난다 어머니는 혼잣말을 좋아하신 게 아니라누군가와 진실을 나누고 싶었다어둠이 내리기 전에 마주 앉아 최근에 쓴 시 2024.11.07
갈색나비 갈색나비 / 이재봉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나비가골목길을 이리저리 떠돌다 살바람에 지쳤는지햇볕이 물든 유리창에 납작이 붙어있다 다음날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갈색 단풍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나비가 단풍이 되었을까단풍이 나비가 되었을까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데단풍 한 잎이 희뿌연 재가 되어 바사삭, 내려앉는다 최근에 쓴 시 2024.11.01
귀뚜리 귀뚜리 / 이재봉 새벽녘 목이 말라 부엌에 나갔더니 귀뚜리가 식탁 위에 버려진빵부스러기를 먹고 있다 가만가만 다가가 빵 한 조각을 식탁위에 올려두자더듬이를 쫑긋 세우고 제 몸보다 큰 빵조각을 짊어지고 후다닥 사라진다 나처럼 새벽잠을 깬 여치가창틈으로 텅 빈 식탁을 흘끔 바라본다 최근에 쓴 시 2024.10.29
잠들지 않는 이름들 잠들지 않는 이름들 / 이재봉 무엇이 잠을 깨운 걸까 *경하는 궁금해져 살금살금 맨발로 걸어 나갔다눈은 내리고 묘비들이 통나무처럼 즐빗이 서있다 파도가 밀려와 무덤들이바닷물에 떠내려가면 어쩌나발을 동동 구르는데친구한테 전화가 왔다홀로 남은 새를 구해달라며 황급히 친구의 집에 달려갔지만새는 이미 죽어있었다뒷문을 열고 나가자 발아래로 다시 물이 차올랐다 무엇이 잠을 깨운 걸까그동안 어떻게 나는 아무렇지 않게학살의 역사를 보고만 있었을까 통나무에 이름만 남겨진 사람들그들의 억울함이 눈꽃이 되어 무덤가를 덮고 있다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주인공 최근에 쓴 시 2024.10.23
한강 효과 한강 효과 / 이재봉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꽃잎을 흔들자그 위를 나르던 작은 새가 슬며시 방향을 바꾼다 그날, 남쪽에서 탕탕거리는 총소리가 멀리 북쪽까지 울려 퍼지자 무참히 죽어가는 비명소리와 함께 통곡이 밀려온다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이세상의 공기를 가르듯폭력이 넘치는 세상일지라도사랑으로 안으면마음이 함께 떨리며응답하게 된다 사람과 자연은 모두가 이어져 있다한쪽이 일렁이면 다른 한쪽이즉시 반응한다 최근에 쓴 시 2024.10.17
가을 문턱에서 가을 문턱에서 / 이재봉 가을이 왔나 싶어재킷을 꺼내 입었는데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여름이다찬 이슬 맺히는 한로가 지났건만바람은 아직 후덥기만 하다 등에 하늘빛이 도는 여름새가 남쪽으로 날아가며바다처럼 짙푸른 하늘에서몸을 적신다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젖은 깃털 하나가찬찬히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최근에 쓴 시 2024.10.10
달항아리 달항아리 / 이재봉 달항아리에는 달이 있습니다술 단지에 빠진 달은 어리어리 떠오르고 앞마당엔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한쪽 눈을 감은 하얀 낮달이술 단지에 빠진 달을 내려다보며배시시 웃고 지나갑니다 둥근 호박이 익어가는 가을 달처럼 깊고 환한 마음이달달한 달항아리에서물씬물씬 피어오릅니다 최근에 쓴 시 2024.10.01
골덴바지 골덴바지 / 이재봉 성묘를 마치고근처 모란시장을 둘러보는데북적이는 시장 한복판을갈색 골덴바지를 입은 아이가엄마 손을 꼭 잡고 지나간다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어머니는 추석빔으로 새 옷을 사오셨다골이 굵은 바지를 입고동무들에게 자랑하던 나를 보며동생은 자기 것은 골이 가늘다며 옆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골덴바지를 보면골 사이로 졸졸 흐르던 어머니의 사랑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최근에 쓴 시 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