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 70

못 / 이재봉 위층에서 쿵쿵 못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을 자던 아내가 깜짝 놀라 깬다 놀라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가슴에 못 자국이 많다는 걸 알았다 항상 그러했다 공연히 퉁퉁거리기만 했지 다정스럽게 말할 줄은 몰랐다 대못만 박는 내 화법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벽에 박힌 못이야 얼른 뽑을 수 있지만 가슴에 박힌 못은 평생 욱신거린다

피타고라스 선생에게

피타고라스 선생에게 / 이재봉 마릴린 먼로가 아름다운 것은 한쪽 얼굴에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이 아름다운 것은 한쪽 면이 일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지구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불균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점이 있는 먼로가 아름다운 것도 일그러진 달이 아름다운 것도 불균형하기 때문입니다

촌철살인의 시인

“피타고라스 선생에게”라는 작품이 눈에 뜨인다. 이 작품에서 특히 괄목할 만 한 점은 불균형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는 점이다. 불균형이란 일 종의 역설이다. 시를 역설의 표현이라고 한 무리는 1930년대의 모더니스 트 시인 등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라는 것은 역설적인 구조를 가지 고 있다. 위대한 역설의 구조를 가진 이 시인의 시작(詩作) 태도에서 더욱 훌륭한 점을 감지할 수 있다. - 문덕수 시인 이재봉 시인의 시는 비교적 짧지만 사유(思惟)의 깊이는 결코 만만치가 않 다. 말하자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행간(行間)이라고나 할까. 그는 사물을 대할 때 일어나는 시적 정서를 직정적(直情的)으로 읊지 않고 한 단계 넘어 사물의 본질에까지 깊이 들어가 봄으로써,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의 철학적 사유를..

부끄러움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러다보니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했다. 부끄러움은 또한 나를 조신하게 만들었다. 원래의 내가 아닌 근사한 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나의 행동을 억누르고 조숙하게 처신했다. 부끄러움이 그렇게 나의 성장을 방해했던(?) 시기에 나는 시(詩)라는 도피처를 찾았다. 내 시에는 과거에 관련된 이미지가 많다. 초등학생 시절 옆집 할아버지에게 쫓겨 몸을 숨겼던 느티나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다가 과거로 빨려 들어간 웜 홀,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옛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던 KTX 등. 나는 과거를 예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속..

관조(觀照)의 세계와 새로운 가능성 / 양수창 시인

필자는 지난 해 연말에 이재봉 시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제3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준비를 해서 새해 봄을 맞아 시집을 출판하겠다고 말했는데 만물이 파릇파릇 약동하는 4월 말에 약속대로 제3시집의 원고를 보내왔다. 이재봉 시인의 제2시집 『시간 여행』 상재 이후, 어느새 6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제2시집에서 필자는 “부끄러움의 미학과 시적 승화를 통한 두 개의 공간”이라는 시집해설을 이미 썼었다. 그런 연유에서 제3시집의 해설을 또 쓰기로 하고 원고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을까 기대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이재봉 시인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시를 살피게 되었다. 흔히 시인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원숙해지는 반면에 관념의 바다에..

성경책 읽는 아내

성경책 읽는 아내 / 이재봉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깨니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서 성경책 읽는 소리가 난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소리 간간이 축복을 달라는 소리 아내의 마음 속에는 창고가 있다 넓고 오래된 창고 안에는 일용할 양식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성경책을 읽는 아내 오늘도 텅 빈 내 마음에 일용할 양식을 놓고 간다

채석강

*채석강 / 이재봉 나는 기억의 퇴적층이다 나였던 것들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던 나도 몰래 살구를 따다 줄행랑을 치던 나도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던 나도 찔레꽃덤불에 앉아 펑펑 울던 나도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 지금 어디에도 나였던 것들은 없다 수천 년 동안 바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채석강처럼 *채석강: 전북 변산반도에 있는 층암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