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1

하양

하양 / 이재봉 홍대 앞 뒷골목 해가 지자 여자는 하얗게 분장을 하고 빨간 하트모형 간판이 삐죽이 걸려 있는 클럽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가 나타나자 여자는 벌겋게 달아오른 정욕과울긋불긋 피어오르는 탐심을 하얀 가면 속에 숨기고지극히 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이키 조명이 빙빙 도는 플로어에서 광란의 춤을 춘다  파티는 끝나고그믐달이 희밋이 동쪽 하늘로 사라지자 여자는 다시 하얗게 분장을 하고 질척한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반쯤 남은 인조속눈썹을눈꼬리에 매달고

말 / 이재봉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초조할 때가 있다 말은 생각이나 느낌을 주고받는 소리에 불과할 뿐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먼지에 의해서 굴절되는가 하면 바람에 의해서 왜곡되고기분에 따라 휘어지기도 한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사랑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종소리

종소리 / 이재봉 새벽녘 침실 너머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또 누가 생을 다했나 보다나는 손끝으로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아직 따스한 기운이 전해졌다 종소리는 생을 마감하는 마침표가 아니라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쉼표다종소리가 들리는 한 나는 살아있고창머리엔 축복의 햇살이 넓게 펼쳐있고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신

당신 / 이재봉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가슴에 불길이 타 올랐습니다불길은 바람처럼 온몸을 휘감았습니다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나를 사랑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린 당신만을 의지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죄 많은 나를 말없이 품어준 당신 나는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당신이 살고 있습니다

불쌍하다는 말

불쌍하다는 말 / 이재봉 그동안 나는 불쌍하다는 말만큼 오만한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쌍하다는 말은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가끔 어머니에게 불쌍하다고 말씀하시는아버지를 보고 알았다입맛이 없다며 국물만 몇 숟갈 뜨다 말아도어쩌다 다리를 살짝만 다박거려도어머니를 안쓰러워하고 가여워하는그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진실한 사랑이었음을아버지를 보고 알았다

우리 동네 원장님

우리 동네 원장님 / 이재봉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주 오던 환자 셋이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원장님은 천사 같아하얗게 웃는 모습이 꼭 천사 같아나는 못 들은 채 지나치며복사꽃이 만발한 창가를 바라보았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말이 없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 그 밑에 절로 길이 생긴다는사마천의 말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