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17

슈퍼문

슈퍼문 / 이재봉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의미부여 하는 걸 좋아합니다 똑같은 달인데도 작게 보이면 마이크로문이고 크게 보이면 슈퍼문이고 붉게 보이면 불러드문이고 한 달에 두 번 뜨면 블루문이라고 합니다 현란한 말에 속지 마세요 언어는 은유이고 환유일 뿐입니다 슈퍼문도 블루문도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머릿속에 떠 있습니다

달이 두 개라면

달이 두 개라면 / 이재봉 하늘에 달이 두 개라면 밤만 되면 서로 사람들을 불러내 작고 좁다란 공(球) 위에서 바동거리며 살지 말고 어서 우주로 나오라며 양쪽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겠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 화성에 집을 짓기도 하고 타이탄에 친구를 갖기도 하다가 욕망의 배를 타고 은하를 건너 점점 더 멀어져 가면 외로움에 서로를 끌어당기며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겠지

유클리드 선생에게

유클리드 선생에게 / 이재봉 당신은 말했지요 평행선은 만날 수 없다고 두 직선이 무한히 이어져도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그런데 인간사에서는 당신의 이론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진답니다 서로 헤어져 영영 볼 수 없는 운명이라도 진실로 그리워하면 지구 반대쪽으로 떠난 파도가 도로 밀려오듯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기하학 원론을 다시 쓸 때입니다 평행한 두 직선은 무한히 이어져도 그리움에 의해서 만날 수 있다

쇠라의 그림 속에는

쇠라의 그림 속에는 / 이재봉 우주의 어느 일요일 쇠라가 푸른 공(球)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늘에 점을 하나둘 찍어나가자 점점 모이면서 은하가 하늘 한 가운데를 흐르고 백조가 그 위를 날고 있다 강가에선 직녀가 칠석날을 기다리며 비단을 짜고 있고 은하 언저리에선 창백한 푸른 점이 반짝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고뇌하는 예술가와 과학자들 썩은 정치인과 타락한 지식인들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한 점에서 살고 있다

다중우주

다중우주 / 이재봉 아현동을 지나가다 봤다 언덕 위에 판잣집이 고층아파트로 바뀌고 시장골목이 빌딩숲으로 바뀐 것을 옛 철학관이 있던 자리에 전봇대가 서있고 참새들이 줄지어 전깃줄에 앉아 있는 것을 아현동 고개를 넘다가 봤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 임으로 사건을 멈춰 세운 것일 뿐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사건의 연속이며 사건은 시간의 줄 위에 늘어서있다 참새들이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