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반추 / 이재봉 말뚝에 매어 놓은 흑염소 한 마리가한가로이 앉아 되새김을 하다가무얼 잘못 먹었는지 볼록 나은 배를 통통거리며 게워낸다 그 옆에서 콩을 키질하며 뉘를 골라내는 할머니에게잘 보이지도 않는 뉘를 어떻게 골라내느냐고 묻자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보인다며소리 없이 웃는다 나도 볼 수 있을까돌이켜보고 또 돌이켜보면내 마음에 쌓인 티를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6.11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 이재봉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낡은 통기타를 메고 청량리역으로 갔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부르며 강릉행 기차를 탔다 별은 소낙비처럼 해변에 쏟아졌다 수많은 별들이 밀려오는 파도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물에 젖어 너울거리는 별잎 하나를 건드리자 혜성처럼 긴 꼬리를 지었다 해변을 걷다가 캔맥주를 마셨다 하늘을 보니 희미한 별 몇 개가 불빛 사이로 아른거렸다 소낙비처럼 쏟아졌던 별들은 간데없고 그 파도 위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출렁거렸고 어쩌다 싸라기처럼 작은 별이 불빛 사이에 섞여 희뜩거렸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부르며 다시 캔맥주를 마셨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5.21
빨간 하늘 빨간 하늘 / 이재봉 파란색 크레파스가 없어서 하늘을 빨갛게 그렸다며아이가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겸연쩍이 꺼내놓았다나는 깜짝 놀라 보고 있던 그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동안 나는 하늘은 파랗다고 규정해 왔다그러나 하늘빛은 규정 속에 있지 않고하늘의 경계를 뛰어넘어 아이의 머릿속에 있었다 물체의 색깔은 뇌에서 느끼는 감각이지존재하는 것은 빛과 그 속성뿐파란 수국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면 빨갛게 보인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5.11
깃발 깃발 / 이재봉 가이드가 깃발을 높이 들자관광객들이 깃발 아래로 몰려든다이제부터 이 깃발만 보고 따라오세요한눈팔다가 깃발에서 멀어지면낯선 나라에서 큰일 납니다 된바람에 중심을 잃은 깃발이 풀럭거리다허공으로 날아가자깃발 아래 뭉쳐있던 무리들이일제히 허공으로 뛰어든다 끈 떨어진 가이드는덩그러니 깃대만 들고 서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4.11
문신 문신 / 이재봉 검정모를 눌러쓴 여자가눈매를 씰룩거리며 지나간다 왼쪽 팔목에는 화살이 꽂힌 하트가 오른쪽 팔뚝에는 뭔가를 의미하는 듯한 레터링이 새겨져 있다 그녀의 몸 곳곳엔 뜨거운 사랑이 녹아내린 자국이 있다온몸을 화판 삼아 자신의 개인사를그려낸 화려한 문신이 내 몸에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있다 기억의 수면 아래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강렬한 감정이 문신으로 남아 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3.01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 이재봉 슈퍼 앞 붕어빵집 붕어 모양의 쇠틀에 달콤한 팥소와 밀가루 반죽을 넣고 쇠틀을 뒤집자 붕어들이 노릇노릇 쏟아져 나온다 따뜻한 붕어빵을 입에 물고 붕어를 먹고 있는지 빵을 먹고 있는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붕어빵 한 개가 찰싸닥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린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1.21
도미노 쇼 도미노 쇼 / 이재봉 시작 신호와 함께 일렬로 늘어선 수만 개의 도미노 조각이 줄줄이 쓰러지자금방이라도 몸을 녹여 버릴 듯 강렬한 기쁨이 밀려온다 쇼는 단 몇 초 만에 끝나고 기운 빠진 구경꾼들은 하나 둘 떠나는데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순식간에 사라진 기쁨을 아쉬워하며멍하니 앉아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을 그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느끼다 만 강렬한 기쁨을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을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3.12.31
자동응답시스템 자동응답시스템 / 이재봉 병원진료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누른 다음 시스템을 쫓아가다 입력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걸었으나 통화량이 많아 연결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쓱히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아내가 냉장고 문이 안 열린다며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렸다 아내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문득 자동응답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스템이 안 되면 두드리세요”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3.11.29
낙화유수 낙화유수 / 이재봉 늦가을 오후도솔천을 한 바퀴 돌아 극락교를 건너가는데아무도 보지 않는 꽃 진 자리에 꽃들이 붉게 피어있다 갈바람이 살랑 지나가자 꽃잎은 이리저리 나붓거리다가잔잔한 물결을 그리며 한가로이 떠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붉은 꽃잎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꽃 진 자리에 우수수 떨어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3.11.01
개싸움 개싸움 / 이재봉 주인 따라 산책 나온 개들이공원 한가운데서 싸우고 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다가 지친 개가 도망치자이번에는 개 주인들이 싸운다 그쪽 개가 먼저 달려들었다며 상대방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옳다며 개처럼 물고 늘어지며 싸운다 그 옆에서 물끄러미 개싸움을 보고 있던 개들이 언제 싸웠냐는 듯 한데 어우러져물고 빨며 장난을 친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