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아나무 조수아나무 / 이재봉 사막에서 만난 조수아나무 논에 벼를 심어놓은 것처럼 일정하게 서서 간밤에 내린 이슬방울을 받아먹는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서로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이는 여백이 아니라 생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런 것인가 그로부터 너무 가깝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어져도 안 되는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9.08.15
밥 밥 / 이재봉 건너편 공사장 건물외벽에 매달린 사내 하얀 페인트를 뿜어낼 때마다 아카시아 꽃이 피어난다 중력을 무시한 채 가느다란 밥줄에 매달려 종일 페인트를 뿜어대다 건물 불이 꺼진 후에야 얼굴에 묻은 꽃가루를 밥알처럼 떼어낸다 문득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러 휘어진 나뭇가지에 오르던 배고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9.06.21
앵두 앵두 / 이재봉 앵두나무 그늘에 앉아 한 여자를 생각했네 앵두같이 맑은 여자 앵두같이 작은 여자, 앵두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 그 여자가 내 머리위에서 빨갛게 익어가네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던 그 여자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8.08.05
놀람 교향곡 놀람 교향곡 / 이재봉 한여름 밤 논길을 걸어가는데 개구리 한 마리가 우웩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핀다 걸음을 멈췄더니 이 논 저 논에서 우웩우웩 마침내 온 들판에서 팀파니를 두드리듯 와글와글 와글와글 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위에서 졸고 있던 별들이 놀라 그만 우두둑 무논으로 떨어진다 개구리들이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무논 속의 별들이 움직거린다 와글와글 반짝반짝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7.23
서울의 누우떼 서울의 누우떼 / 이재봉 누우떼가 달린다 마라강처럼 길게 뻗은 한강을 건너 파랗게 풀이 돋아난 강남으로 무섭게 질주하는 누우떼 어린 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사자에게 끌려가고 병든 동료가 지쳐 쓰러져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꼬리털 죽비로 제 등을 후려치며 땅을 구르며 달린다 먼지 자욱한 판교 신도시 붉은 띠의 철거민들이 진압대에 떠밀려 길바닥에 누워있는데도 초지를 손에 넣기 위해 아랑곳없이 내달리는 서울의 누우떼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6.30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 이재봉 들판을 지나 폐가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걸어온다 나를 이기면 너를 살려주겠다며 도깨비가 덤벼든다 할아버지는 도깨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쇠말뚝 같은 도깨비의 다리는 꿈쩍도 않는다 다시 발목을 잡고 오른쪽 어깨로 도깨비를 밀자 쿵 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 진다 구름 속에 숨어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보름달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도깨비는 씨름에서 졌으니 약속대로 너를 살려준다면서 돈과 보물을 내놓고는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눈부시고 눈부신 밤이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6.17
물총새 물총새 / 이재봉 서해대교에서 만난 물총새 한 쌍 상처 입은 수컷을 암컷이 등에 업고 바다 위를 날아간다 화물트럭을 몰던 남편이 병으로 앓아눕자 남편 대신 운전대를 잡은 아내, 주렁주렁 링거를 단 남편을 운전석 뒤에 태우고 오늘도 고속도로를 날아가는 저 물총새 부부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5.31
북극성 북극성 / 이재봉 저물녘 논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서 본 듯한 별 하나가 도랑 속에서 반짝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밝혀준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11.09
호박꽃 호박꽃 / 이재봉 이른 아침 아파트 뒷산을 오르는데 길가 풀숲에서 어머니 냄새가 난다 가만히 덤불 속을 헤치자 노란 호박꽃이 단내를 풍기며 벌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언제 곱게 화장했던 적이 있었을까 평생 단내를 달고 사신 어머니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느라 시름시름 잎이 지고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저 호박꽃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9.30
여름날 여름날 / 이재봉 잠자리 한 쌍이 얼러붙어 물속에 잠긴 풀잎을 흔든다 멱을 감던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바사삭거리며 암컷 날개 한쪽이 부서진다 그러자 수컷이 다친 암컷 을 업고 강둑으로 날아간다 아이들이 물 속에서 뛰어나와 달리다가 한 아이가 넘 어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 강둑길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아버지께서 추억 속으로 걸어가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