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밥 한 끼

밥 한 끼 / 이재봉 늦가을 오후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 길을 걸어가는데논둑에서 새참을 먹던 농부가밥 한술 뜨고 가라며 날 부른다구슬구슬 밥솥이 내뿜는 소리처럼 구수한 노래는 없고밥 한 끼 하자는 말처럼 반가운 말은 없다남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밥을 대접하는 일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건 밥만 한 게 없다

은행나무

은행나무 / 이재봉 돌담길 모퉁이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그루 땅에 머리가 닿을 듯 엎드려 있다모진 빙하기를 견디며 살아온 나무밑동이 움푹 파인 나무에는 혹독한 추위를 피해 몸을 숨긴 매머드의 흔적이 여기저기 옹이가 되어 박혀 있다시커멓게 무덤이 된 밑동을 들여다보자 온갖 풍상이 서려 있는 옹이 사이로 연둣빛 새싹이 움틀 거린다

서동에게 묻다

서동에게 묻다 / 이재봉  노래방에서 만난 선화 붉은색 차양 모자를 눌러쓰고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오늘밤도 그걸 안고 잠이 든다네~’  알 사람은 다 안다 선화가 경주 갑부 김백정의 셋째 딸이라는 걸 첫째 딸은 눈 밖에 나고둘째 딸은 중이 되겠다고 머리를 깎고셋째 딸이 유일한 상속자라는 걸 그대가 야심가라는 것도 다 안다소문을 퍼뜨려 선화를 꾀어낸 것도 그대라는 걸 온 동네가 다 안다  그대에게 묻는다정녕 선화를 사랑했는가오로지 야망을 위해서 그리했는가다시 한번 묻는다선화를 꾀어낸 저의는 무엇인가

새드무비

새드무비 / 이재봉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데물방울 하나가 방바닥에 뚝 떨어진다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살피는데아내가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주인공이 불쌍하다 했다 나도 따라 울었다슬그머니 눈물을 훔치며 다시 영화를 보고 있는데주인공 남편이  아내의 몸에서 울고 있다나는 텔레비전을 끄고옆으로 시선을 돌린 채또 따라 울었다

메기의 추억

메기의 추억 / 이재봉 어머니의 손맛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손맛이 좋아서가 아니라그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아버지가 불렀던 메기의 추억을 흥얼거리는 것도 내 몸이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어머니의 손맛은 여전히 손녀의 손끝에서 풍겨 나오고손자는 오늘도 메기의 추억을 흥얼거리며 놀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은 / 이재봉 레고 조각은 무엇이든 만든다파란 조각을 쌓아 집을 만들고 가차를 만들어 외갓집에 가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도 난다 시 쓰기도 레고 조각을 쌓는 것처럼 기억을 모아 재구성 하는 일이다어릴 때 들었던 후티새 소리를 불러내 시를 만들고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 냄새를 맡으며 시를 쓴다  시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레고 조각처럼 기억의 창고에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꺼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마치 백지 위에 물감을 칠해야 그림이 되듯이

잠 / 이재봉 산들산들 잠이 들었다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르자 커다란 성문이 보였다 나는 성 안으로 들어가 광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이마가 툭 튀어나온 소크라테스가 죽어서 호메로스를 만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죽고 싶다며 사람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낯선 사람들이 서성서성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광장을 빠져나와 연옥의 불을 저장한 산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흰 당나귀를 타고 나타샤를 찾아 헤매는 백석의 얼굴도 보였다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 사방으로 뻗은 길이 한눈에 들어 오는 순간 건장한 사내가 길을 막아섰다 안개가 걷히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연옥빛 햇살을 받으며 다시 하늘로 올랐다

키오스크

키오스크 / 이재봉 점심을 먹으러 패스트푸드점에 들렸다주문하시려면 터치하세요키오스크가  지시하는 대로 메뉴를 고르고카트 담기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식사장소와 결제방식을 선택하라는 화면이 뜬다테이크아웃과 카드결제하기를 선택한 다음투입구에 카드를 집어넣자주문이 완료되었다며 주문번호가 뜬다 주문서를 들고 음식을 받으러 가는데매장 직원이 신호등처럼 카운터 구석에 서서주문한 음식을 전해준다표정도 목소리도 소거된 채 매뉴얼화 된 말만 되풀이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