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딱따구리

딱따구리 / 이재봉 숲길을 걷고 있는데 딱따구리가딱딱딱 나무를 쪼며 구멍을 내고 있다 어데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우리 집 안방에도 딱따구리가 살고 있다내 곁에 찰싹 붙어서 하루에 수천 번씩 단단한 부리로 쪼아댄다때로는 가슴에 구멍을 내기도 하고어느 땐 입안에 먹이를 넣어 주기도 한다오늘도 집을 나서는데 검정 드레스에 빨간 베레모를 쓰고 현관 앞에 서서 쪼아댄다딱딱딱 따다다닥

매미

매미 / 이재봉 매미가 방충망에 달라붙어 목이 터져라 울고 있다 낮에도 그렇게 울어 대더니 한밤중에도 또 울어 댄다 그녀의 집 앞에서 세 시간 넘게 기다리다 허공을 부여잡고 마구 울던 시절이내게도 있었다  땅속에서 삼 년을 기다리다 제 몸을 찢고 나와 애타게 짝을 부르는 매미 울부짖는 소리가잠을 삼키고 밤을 삼키더니 마침내 나까지 삼켜버린다

용머리꽃

용머리꽃 / 이재봉 고개를 쳐들고 서 있는 용머리꽃을 내려다보다 그만풀뿌리에 걸려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땅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올려다보니 용의 얼굴들이 지나간다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광 인 효 현 숙 경 영 정 순 헌 철 고 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온갖 조화를 마음대로 부리며 민초를 짓밟고 오만하게 서 있는

연꽃

연꽃 / 이재봉 산사를 내려오는데개울 녘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있다맑은 물방울을 도르르 굴리며희맑게 서 있다 더러운 물을 먹고서도 어쩜 저리 맑은 물방울을 토해낼까너는 단 한 번이라도 오욕에 물들지 않고맑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한 번이라도 증오의 가슴에사랑의 꽃을 피워본 적이 있는가 진흙땅에 발을 묻고서도 순백의 꽃을 피워내는 연꽃대낮인데도 환히 등불을 켜들고 어두운 세상을 밝힌다

하이눈

하이눈 / 이재봉 태양이 이글거리는 정오 백사장에 누워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다 하늘에서 퍼붓는 불화살 같은 햇살을 견디다 못해 모래 속으로 들어간다 모래 속은 적요하다  내 몸에 그늘이 생기자 졸음이 쏟아진다 내 몸 아래로 서늘한 석실이 보인다 터번을 두른 아랍인 남자가 누워있다 남자는 뫼르소가 왜 나를 죽였는지 모른다며 눈부신 태양을 원망한다  졸음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자 나처럼 태양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고 태양은 온종일 하늘 가운데 멈춰있고 나는 모래 속에 누워있다

목계

목계 / 이재봉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오는데도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떠드는데도 수탉 한 마리가 꿈적도 하지 않고 횃대에 않아 있습니다 궁금해서 닭장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이제 막 부란한 병아리 모습 그대로평화롭게 않아있었습니다나무로 깎아 놓은 닭 같았습니다상대방이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봐도주위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미동에 흔들리지 않고 나무처럼 앉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