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시집 [사랑풍경]/사랑의원근법 3

낮과 밤

낮과 밤 / 이재봉 뚫린 열쇠 구멍으로 남자의 방을 들여다봅니다 책상 위엔 할로겐램프가 대낮같이 밝혀있고 남자 는 겉옷을 입은 채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별 들 마저 졸린지 눈을 반만 뜨고 있는데도 남자는 여 전히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여자는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 침대에 누웠습니 다 외따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여자는 밤꽃이 묻어있는 커튼을 부둥켜안고 체위를 바꿔가며 소 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밤이 흐르고 다시 또 흘러도 남자의 방엔 밤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

하늘과 땅 / 이재봉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많은 죄의 사함을 받느니라‘ 루까에 의한 거룩한 복음이 끝나자 사제는 푸른 제의를 무겁게 끌 며 강론대로 나가 천주의 어린양들을 향해 성(聖)스러운 하늘의 말씀을 전합니다 천주의 어린양들은 부끄러운 두 볼 을 미사포에 감추고 자꾸자꾸 가슴을 치며 은총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멀리서 참례하던 빨간 사마리아 양들이 하얀 미사포 사이로 깜박 거립니다 간밤 앵두를 따먹고 빨개진 입술로 성(性 )스러운 땅 위의 말들을 나누며 낄낄댑니다 미사가 끝나고 천주의 어린양들이 하얗게 일어설 때까지 사 제는 끝내 사마리아 양들의 성(性)스러운 땅 위의 말들을 듣 지 못합니다

겉과 속

겉과 속 / 이재봉 오늘도 607호 아파트에서는 비명 소리가 흘렀습니다 남편에게 맞은 부인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툭 터진 블라우스 사이로 젖가슴이 삐죽 나와 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은 소복이 부어 있었습니다 이웃들은 시시덕거리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아플까 저렇게 아파도 될까 별들이 걱 정하는 가운데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 싸웠던 부부가 깔깔대며 복도를 걸어갔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손에 사랑을 쥐어주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지다 남은 별 몇 개가 그녀의 눈 속에서 졸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