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테세우스의 배 / 이재봉 일을 하다가 문득,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얼룩 한 점 없던 이마에가뭇가뭇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봐도예전의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테세우스의 배처럼십 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같은 사람일까 과거의 기억만이나를 현재의 나로 이어 줄뿐나를 이룬 것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포노사피엔스 2024.03.21
신발 신발 / 이재봉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종로에서 혼자 지하철을 탔다 파란 줄무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줄에 오종종 앉아 있다 신발 끈이 풀어진 학생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있고 뒤꿈치를 구부려 신고 있는 학생은 비스듬히 앉아 졸고 있다 지하철이 철교를 지나며 흔들거리자 신발 하나가 해진 앞꿈치 사이로 하얗게 웃고 있다 순간 신발 속에 감춰졌던 내 모습이 희끗희끗 지나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4.03.11
문신 문신 / 이재봉 검정모를 눌러쓴 여자가눈매를 씰룩거리며 지나간다 왼쪽 팔목에는 화살이 꽂힌 하트가 오른쪽 팔뚝에는 뭔가를 의미하는 듯한 레터링이 새겨져 있다 그녀의 몸 곳곳엔 뜨거운 사랑이 녹아내린 자국이 있다온몸을 화판 삼아 자신의 개인사를그려낸 화려한 문신이 내 몸에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있다 기억의 수면 아래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강렬한 감정이 문신으로 남아 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3.01
말 말 / 이재봉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초조할 때가 있다 말은 생각이나 느낌을 주고받는 소리에 불과할 뿐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먼지에 의해서 굴절되는가 하면 바람에 의해서 왜곡되고기분에 따라 휘어지기도 한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사랑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4.02.21
슬픔이 슬픔을 슬픔이 슬픔을 / 이재봉 슬픈 사람은 더 슬픈 사람을 보고 눈물을 멈추고아픈 사람은 더 아픈 사람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내가 힘들어도 살 수 있는 것은나보다 힘든 사람의 삶을 보면서 위안을 느끼기 때문이고 내가 외로워도 살 수 있는 것은외로움이 외로움을 달래주고 감싸주기 때문이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4.02.11
불확실의 시대 불확실의 시대 / 이재봉 맞거나 맞지 않아도 그녀의 말은 항상 “맞는 것 같아요”다확신에 찬 표현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그녀의 몸 곳곳에는 방어벽이 세워져 있다스스로 느끼는 감정마저 정확히 표현하지 않고 추측하거나 불확실하게 말한다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존하기 위해서다불확실한 사회에서 시비에 휩쓸리지 않고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터득한 것이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포노사피엔스 2024.02.01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 이재봉 슈퍼 앞 붕어빵집 붕어 모양의 쇠틀에 달콤한 팥소와 밀가루 반죽을 넣고 쇠틀을 뒤집자 붕어들이 노릇노릇 쏟아져 나온다 따뜻한 붕어빵을 입에 물고 붕어를 먹고 있는지 빵을 먹고 있는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붕어빵 한 개가 찰싸닥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린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4.01.21
위대한 일 위대한 일 / 이재봉 슬프면 슬퍼할 줄 알고 기쁘면 기뻐할 줄 아는 것보다 대단한 것은 없다 괴로우면 괴로워할 줄 알고 즐거우면 즐거워할 줄 아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또 없다 슬픔을 슬픔으로 덮고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덮는 것 이것이 바로 대단하고 위대한 일이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4.01.11
종소리 종소리 / 이재봉 새벽녘 침실 너머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또 누가 생을 다했나 보다나는 손끝으로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아직 따스한 기운이 전해졌다 종소리는 생을 마감하는 마침표가 아니라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쉼표다종소리가 들리는 한 나는 살아있고창머리엔 축복의 햇살이 넓게 펼쳐있고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슬픔이 슬픔을 2024.01.01
도미노 쇼 도미노 쇼 / 이재봉 시작 신호와 함께 일렬로 늘어선 수만 개의 도미노 조각이 줄줄이 쓰러지자금방이라도 몸을 녹여 버릴 듯 강렬한 기쁨이 밀려온다 쇼는 단 몇 초 만에 끝나고 기운 빠진 구경꾼들은 하나 둘 떠나는데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순식간에 사라진 기쁨을 아쉬워하며멍하니 앉아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을 그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느끼다 만 강렬한 기쁨을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을 제5시집 [익명의 시선]/데칼코마니 2023.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