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 78

신기루

신기루 / 이재봉 사막을 걷고 있는데 신기루가 보인다닿을 듯 말 듯 신기루에 다가가는 순간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사랑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손안에 넣을 수가 없다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욕구일 뿐욕망은 다시 남아 끝없는 사랑을 향해가고 또 간다  사랑도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은 아닐까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잡는 순간 저만큼 또 물러난다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 / 이재봉 파란 모자를 거꾸로 쓴 청년이 고개를 외로 꼬고 핸드폰을 본다 콩나물처럼 머리를 볶은 중년 여자가 고개를 꺼벅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등에 책가방을 둘러멘 학생 둘이 고개를 너붓대며 핸드폰을 본다 무슨 일이 있는지 머리가 하얀 노인이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핸드폰을 본다 전동차가 잠실역을 빠져나가자 막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고개를 소곳이 기울이고 책을 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꿈 / 이재봉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범고래 한 마리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꿈을 꼭 잡고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향고래가 육중한 머리 를 흔들며 나타났다 슬며시 향고래 몸속으로 들어가자 날개가 부서진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고 그 위로 누런 가오리가 날아다녔고 혹등고래가 흰 거품을 물고 튀어나왔다 혹등고래 를 따라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좁고 어두운 터널에서 대왕고래를 만났다 나는 몸의 크기를 바꾸고 대왕고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디선가 짧고 날카로운 고주파 음이 들렸다 “꿈을 꼭 잡고 있어라!” 나는 대왕고래를 움켜잡고 다시 새우잠을 잤다 꿈속에는 향고래가 있었고 혹등고래가 있었고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