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신발 / 이재봉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종로에서 혼자 지하철을 탔다 파란 줄무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줄에 오종종 앉아 있다 신발 끈이 풀어진 학생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있고 뒤꿈치를 구부려 신고 있는 학생은 비스듬히 앉아 졸고 있다 지하철이 철교를 지나며 흔들거리자 신발 하나가 해진 앞꿈치 사이로 하얗게 웃고 있다 순간 신발 속에 감춰졌던 내 모습이 희끗희끗 지나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4.03.11
사자춤 사자춤 / 이재봉 몸을 좌우로 흔들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무언가 잡아먹는 시늉을 하며사자 모습을 흉내 내다 광대가 힘에 못 이겨 쓰러진다그러자 한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가탈을 벗고 탈춤을 춘다희슥희슥 갈기를 휘날리며덩 더 덕궁 쿵 더 덕쿵쓰러진 광대의 손을 붙잡고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9.29
딱정벌레 딱정벌레 / 이재봉 딱정벌레 한 마리가 말벌이 윙윙거리며 다가오자발라당 몸을 뒤집고 죽은 체한다 키 큰 사내가 씨름을 걸어오자머리를 상대방의 배 밑에 밀어 넣고되받아 넘어뜨리는 키 작은 사내쓰러질 듯 뒤뚱거리다가 뒤집기로 한판승을 거둔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뒤집기로 상황을 역전시킨 딱정벌레처럼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9.07
용머리꽃 용머리꽃 / 이재봉 고개를 쳐들고 서 있는 용머리꽃을 내려다보다 그만풀뿌리에 걸려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땅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올려다보니 용의 얼굴들이 지나간다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광 인 효 현 숙 경 영 정 순 헌 철 고 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온갖 조화를 마음대로 부리며 민초를 짓밟고 오만하게 서 있는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8.15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 이재봉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벼락도 그렇다꽃과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비는 내리고죄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벼락은 친다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도내리막길을 편안히 걷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다지금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7.27
개구리 개구리 / 이재봉 빨리 숨어! 유혈목이 나타났어누군가가 소리쳤지만 수컷 개구리는 도망이란 없다유유히 암컷 주위를 맴돌며 턱밑의 울음주머니를 한껏 부풀리며 으스댄다어쩌자고 개구리는 저렇게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쪽으로 뛰어가는 걸까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7.17
목계 목계 / 이재봉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오는데도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떠드는데도 수탉 한 마리가 꿈적도 하지 않고 횃대에 않아 있습니다 궁금해서 닭장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이제 막 부란한 병아리 모습 그대로평화롭게 않아있었습니다나무로 깎아 놓은 닭 같았습니다상대방이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봐도주위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미동에 흔들리지 않고 나무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7.07
군중 군중 / 이재봉 호산나! 호산나여!그를 나귀 등에 태우고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자죽여! 죽여! 소리를 지른다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군중들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마리가 강으로 뛰어들자 뒤따라 뛰어드는 들소 떼 같다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뭇잎처럼그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갈릴리 호수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호산나! 호산나! 를 외친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4.07
조합원 조합원 / 이재봉 머리에 띠를 두른 조합원들이 우우우 화물차를 세워놓고 함성을 지른다 그 틈에서 고함을 지르던 조합원 A가 집에 일이 생겼다며 슬그머니 화물차를 끌고 시위현장을 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합원 B가 그게 밥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띠를 벗어던지고 서둘러 시동을 건다 막 도착한 조합원 C가 현장을 떠나는 화물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친다 내 밥그릇만 챙기며 침묵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들의 노예가 될 거라고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3.01
거북이 거북이 / 이재봉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으렴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사람이 춤을 추며 거북이를 유혹하자 거북이는 할 수 없이 황금알을 내준다 그 후 그는 무슨 일만 터지면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을 외우고 다닌다 오직 주술만이 나라를 구하고 더없이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며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엉겁결에 황금알을 내준 거북이는피식 콧물을 내뿜으며엉금엉금 바닷가로 기어간다 제5시집 [익명의 시선]/익명의 시선 2023.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