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 85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서 깊은 의미를 찾는 시인

이재봉 시인은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일상적인 상황과 과거의 추억을 잘 조화시키는 데 능숙하다. 일상적인 경험과 과거의 경험을 시적인 경험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중요한 문학적 의의 중 하나이다. 이재봉 시인의 시는 간결하고 명료한 서술이 특징이다. 그는 자연스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다소 직설적인 표현과 과잉된 감정 표현이 때때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자들의 감정에 공감을 일으킨다. 이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독자들은 이재봉 시인의 작품을 즐..

익명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봄비 내리던 날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파란 줄무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줄에 오종종 앉아 있다. 끈이 풀린 신발을 신고 있던 한 학생이 비스듬히 앉아 옆 친구의 핸드폰을 훔쳐보면서 낄낄거린다,  다음 역에서 여학생 서넛이 올라타자 뒤꿈치를 구부려 신고 있던 학생이 두두룩한 여학생의 엉덩이를 곁눈으로 훔쳐본다, 지하철이 철교를 지나며 흔들거리자 신발 하나가 해진 앞꿈치 사이로 하얗게 웃고 있다. 순간 신발 속에 감춰졌던 내 모습이 희끗희끗 지나간다. 벨기에의 저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신발인지 맨발인지 알 수 없는 「붉은 모델(Le Modèle Rouge)」 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왜 맨발의 모양을 하고 있는 기이한 신발을 그렸을까? 그 신발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는..

반추

반추 / 이재봉 말뚝에 매어 놓은 흑염소 한 마리가한가로이 앉아 되새김을 하다가무얼 잘못 먹었는지 볼록 나은 배를 통통거리며 게워낸다 그 옆에서 콩을 키질하며 뉘를 골라내는 할머니에게잘 보이지도 않는 뉘를 어떻게 골라내느냐고 묻자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보인다며소리 없이 웃는다 나도 볼 수 있을까돌이켜보고 또 돌이켜보면내 마음에 쌓인 티를

가을 하늘

가을 하늘 / 이재봉 가을 하늘이 시린 이유는 눈물 때문이다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밤새 흘렸던 눈물이 허공을 떠돌다 차가운 햇볕과 부딪히면서 시퍼렇게 멍이 들었기 때문이다까치도 날아가다가 말고나뭇가지에 앉아 깍깍 울고 간다골짜기의 물이 시퍼렇게 흐르는 것도눈물 때문이고버들가지가 파르르 떠는 것도 눈물 때문이다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 이재봉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낡은 통기타를 메고 청량리역으로 갔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부르며 강릉행 기차를 탔다 별은 소낙비처럼  해변에 쏟아졌다 수많은 별들이  밀려오는 파도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물에 젖어 너울거리는  별잎 하나를 건드리자 혜성처럼 긴 꼬리를 지었다  해변을 걷다가 캔맥주를 마셨다  하늘을 보니 희미한 별 몇 개가 불빛 사이로 아른거렸다 소낙비처럼 쏟아졌던 별들은 간데없고 그 파도 위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출렁거렸고  어쩌다 싸라기처럼  작은 별이 불빛 사이에 섞여 희뜩거렸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부르며 다시 캔맥주를 마셨다

빨간 하늘

빨간 하늘 / 이재봉 파란색 크레파스가 없어서 하늘을 빨갛게 그렸다며아이가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겸연쩍이 꺼내놓았다나는 깜짝 놀라 보고 있던 그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동안 나는 하늘은 파랗다고 규정해 왔다그러나 하늘빛은 규정 속에 있지 않고하늘의 경계를 뛰어넘어 아이의 머릿속에 있었다 물체의 색깔은 뇌에서 느끼는 감각이지존재하는 것은 빛과 그 속성뿐파란 수국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면 빨갛게 보인다

하양

하양 / 이재봉 홍대 앞 뒷골목 해가 지자 여자는 하얗게 분장을 하고 빨간 하트모형 간판이 삐죽이 걸려 있는 클럽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가 나타나자 여자는 벌겋게 달아오른 정욕과울긋불긋 피어오르는 탐심을 하얀 가면 속에 숨기고지극히 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이키 조명이 빙빙 도는 플로어에서 광란의 춤을 춘다  파티는 끝나고그믐달이 희밋이 동쪽 하늘로 사라지자 여자는 다시 하얗게 분장을 하고 질척한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반쯤 남은 인조속눈썹을눈꼬리에 매달고

파티션

파티션 / 이재봉 3센티 사이에 그와 내가 있다그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나는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는 구름이 엉겨있는 하늘을 보니 비가 내릴 것 같다며 비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나는 C:드라이브를 분할하고 있다고 답한다  주르르 창문으로 빗물이 흘러내리자 그는 이모티콘 속에서 울고 있고 나는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이터를 다른 파티션으로 백업한다  그는 파토스로 묻고 나는 로고스로 답한다  3센티 사이는 아득하다그는 동쪽에서 묻고나는 서쪽에서 답한다

깃발

깃발 / 이재봉 가이드가 깃발을 높이 들자관광객들이 깃발 아래로 몰려든다이제부터 이 깃발만 보고 따라오세요한눈팔다가 깃발에서 멀어지면낯선 나라에서 큰일 납니다 된바람에 중심을 잃은 깃발이 풀럭거리다허공으로 날아가자깃발 아래 뭉쳐있던 무리들이일제히 허공으로 뛰어든다 끈 떨어진 가이드는덩그러니 깃대만 들고 서있다

만년필

만년필 / 이재봉 내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는 손때가 오른 만년필이 꽂혀있다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신 만년필 무딘 펜촉을 꾹꾹 누르며 글을 쓰면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뒷동산에 올라 ‘메기의 추억’을 부르던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수십 년 동안 왼쪽 가슴에 꽂혀 심장을 뛰게 했던 검정 만년필 이제는 닳아 없어질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의 반려가 되었다오늘도 나는 녹슨 촉을 삭삭거리며아직 끝내지 못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