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16

스팩

스펙 / 이재봉 마트 정육점 코너에 진열된 쇠고기, 제 몸에 큼직한 라벨을 붙여놓고 덜덜 떨며 고객을 부른다 누군가 라벨을 쳐다보며 육질등급은 일등급인데 마블링이 별로 없다며 다른 라벨을 기웃거린다 차곡차곡 스펙을 쌓아 놓고 면접관 앞에 앉은 사내 학점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토익점수가 너무 낮다며 면접관이 다음 지원자를 부르자 발이 저린지 사내는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며 면접장을 나간다

역삼역에서

역삼역에서 / 이재봉 전동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좁은 승강장 안에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자판기 돈 집어먹는 소리만 긴 침묵의 틈에서 새어 나왔다 신문을 사려고 바둑판처럼 생긴 보도블록을 밟으며 신문판매대 쪽으로 걸어가는데 바둑무늬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만 서고 말았다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내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분명 내 발인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낱말찾기

낱말 찾기 / 이재봉 스타박스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두어 시간을 떠들고 나니 입도 아프고 귀도 아팠습니다 우리는 원형 탁자에 신문을 펼쳐 놓고 좋아하는 낱말에 동그라미를 그었습니다 사랑, 평화, 행복, 영원, 기쁨, 부자....... 해는 지고 별들이 내려와 찻잔 속에서 졸고 있을 때까지 우리는 끝내 눈길 주위에서 마주치는 그 흔한 낱말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미움, 고통, 불행, 이별, 슬픔, 가난.......

경칩날 아침

경칩날 아침 / 이재봉 스톱, 스톱 개구리가 튀어나와요 아내의 비명 소리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반대편 찻길에서 꽝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헬멧을 쓴 사내가 도로 한 가운데로 튕겨 나온다 위태위태하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 아침 햇살을 잘게 부수며 앰뷸런스가 달려온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비워내기

비워내기 / 이재봉 필요 없는 돌을 다 떼어내야만 부처님의 참 모습이 나온다며 석공은 돌을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그는 정을 들고 모든 것을 떼어낸다 눈가에 붙은 오만도 떼어내고 가슴에 박힌 원망도 떼어내고 뱃살에 붙은 욕심도 떼어낸다 이제 그만 됐다며 할머니가 재촉하자 이제야 돌 속에서 부처를 찾았다며 부처님처럼 빙긋이 웃는다

굴뚝새

굴뚝새 / 이재봉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굴뚝새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다시 나가려고 발버둥친다 양 옆 창문이 다 열려 있는데도 계속해서 앞 유리창 쪽 으로만 날갯짓을 한다 승객들은 숨죽이고 앉아 굴 뚝새의 안전 탈출을 기원했지만 끝내 앞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진다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내 검찰의 조사가 시 작되자 주위사람들에게 부끄럽다며 신발 한 짝만 남겨두고 17층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앞으로 나는 것 밖에 모르는 굴뚝새 같은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