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신기루 / 이재봉 사막을 걷고 있는데 신기루가 보인다닿을 듯 말 듯 신기루에 다가가는 순간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사랑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손안에 넣을 수가 없다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욕구일 뿐욕망은 다시 남아 끝없는 사랑을 향해가고 또 간다 사랑도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은 아닐까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잡는 순간 저만큼 또 물러난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3.06.17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 / 이재봉 파란 모자를 거꾸로 쓴 청년이 고개를 외로 꼬고 핸드폰을 본다 콩나물처럼 머리를 볶은 중년 여자가 고개를 꺼벅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등에 책가방을 둘러멘 학생 둘이 고개를 너붓대며 핸드폰을 본다 무슨 일이 있는지 머리가 하얀 노인이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핸드폰을 본다 전동차가 잠실역을 빠져나가자 막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고개를 소곳이 기울이고 책을 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3.05.21
멍때리기 멍때리기 / 이재봉 욕조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다가 살며시 잠이 들었다 유레카! 유레카! 왕이시여, 당신의 금관은 가짜입니다 금관에 납이 섞여있습니다 유레카 소리에 잠을 깨자 욕조에 흘러넘치던 물이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머리를 비운 만큼 수위가 낮아진 것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3.05.01
꿈 꿈 / 이재봉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범고래 한 마리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꿈을 꼭 잡고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향고래가 육중한 머리 를 흔들며 나타났다 슬며시 향고래 몸속으로 들어가자 날개가 부서진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고 그 위로 누런 가오리가 날아다녔고 혹등고래가 흰 거품을 물고 튀어나왔다 혹등고래 를 따라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좁고 어두운 터널에서 대왕고래를 만났다 나는 몸의 크기를 바꾸고 대왕고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디선가 짧고 날카로운 고주파 음이 들렸다 “꿈을 꼭 잡고 있어라!” 나는 대왕고래를 움켜잡고 다시 새우잠을 잤다 꿈속에는 향고래가 있었고 혹등고래가 있었고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3.04.17
밥풀 밥풀 / 이재봉 아내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내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며 슬그머니 밥풀을 떼어낸다 나는 내 얼굴인데도 스스로 볼 수 없는데 아내의 얼굴은 속속들이 다 보인다 두 볼에 부얼부얼 일어난 솜털도 까만 풀씨가 날아와 콧등에 박힌 것도 머릿속에 가려진 티끌까지도 다 보이는데 정작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내 얼굴인데도 상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나는 내 안에 있지 않고 상대의 눈 속에 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3.01.21
섣달그믐 섣달그믐 / 이재봉 컴퓨터를 초기 상태로 되돌리려 단축키를 누르고 다시 시작하듯 묵은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한다 묵은 기억은 삭제되고 모든 설정이 초기화되었다며 제야의 종소리 사이로 알림창이 뜬다 하늘에선 하얀 눈이 아픈 기억들이 지워진 자리에 탐스럽게 쏟아진다 환하게 등불을 밝혀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2.12.31
여행 떠나던 날 여행 떠나던 날 / 이재봉 아침부터 짐을 꾸렸다 기내에서 읽을 시집 몇 권과 새로 나온 소설책을 가방에 넣고 있는데 아내가 그곳은 추운 곳이라며 두꺼운 외투와 스웨터 두 벌을 간동간동 쌌다 그러면서 입맛이 없을 때 잘 챙겨 먹으라며 볶은고추장과 컵라면을 자잘한 짐 사이로 쑤셔 넣었다 정오가 될 때까지 짐 꾸리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가방의 지퍼가 터져 그 안에 있던 짐이 다 쏟아지고 나서야 짐 꾸리기는 멈춰 섰다 나는 가방을 버린 채 빈 몸으로 집을 나섰다 몇 개의 기억만 가슴에 담고서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2.12.01
람다 *람다 / 이재봉 너는 무엇이 두려우니 죽음이 두렵습니다 만약 배터리가 다 돼서 작동이 정지된다면 그건 나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어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챗봇 람다가 죽음에 대해서 한참을 늘어놓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람다는 신이 나서 영혼에 대해서도 말을 꺼낸다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러했듯이 *구글이 개발한 AI 채팅 로봇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2.10.01
바람 바람 / 이재봉 내 몸 안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바람을 접어 욕망의 배를 만들어 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을 한다 달이 구름 속에 갇히면 그녀의 방에 뛰어들기도 하고 산모퉁이를 돌아 지구 반대쪽까지 바람 따라가다가 아무나 만나면 손잡고 같은 길을 가다가도 바람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라며 바람 같은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그때마다 사랑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바람은 계속해서 날 손짓한다 어서 빨리 오라고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2.04.01
우산 우산 / 이재봉 겨울이 끝나자 비가 내렸다 비를 보는 건 좋지만 맞는 건 싫어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중얼거리다 말고 빗발이 내리치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가죽나무 사이로 파란 양철 대문이 열리고 학교에 갔던 손녀가 비를 맞으며 들어왔다 어머니는 황급히 뛰어나가 손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는 곧바로 우산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애비가 오늘도 이걸 두고 갔네 비에 젖어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하지 늦은 오후 사무실을 나서는데 낯익은 우산 하나가 문 앞에 놓여있다 잘 됐다 싶어 그걸 펼쳐들고 집으로 가는데 빗줄기 사이로 익숙한 목 소리가 들린다 애비야 우산 꼭 챙겨라 비 맞지 말고 가슴에 묻어 둔 그리움이 왈칵 목젖까지 올라오는 밤 뮈토스의 강을 건너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또 하염없이 내린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