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15

줄 / 이재봉 줄이 사무실에서 거래처로 관공서에서 은행으로 식당으로 하루 종일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 어디 한번이라도 줄 없 이 다닌 적이 있던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줄은 다시 나를 네트워크에 묶어 놓고 지구 끝까지 끌고 다닌다 거미 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버둥거리며 사는 세상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끈끈한 줄이 온 몸을 더욱 휘감는다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 이재봉 간척지 갯벌에서 죽은 기러기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바싹 마른 날개가 푸석푸석 부스러지고 퉁퉁 불은 배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환경감시원이 검은 봉지에 주검을 거두어가자 갯지렁이들이 유품을 수습하고 있다 자식에게 날개를 내주고 차가운 골방에서 그리움에 떨다가 가슴으로 바다를 건너다 그만 갯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얼어 죽은 기러기 아빠

허수아비

허수아비 / 이재봉 한 쪽 팔을 잃은 허수아비 테만 남은 밀짚모자를 참새 떼가 건들고 지나가자 없어진 팔을 파르르 떨며 꽁꽁 언 땅에 우두커니 서 있다 구조조정으로 목이 잘린 박 선배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다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깨를 툭 치고 달아나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한때는 수 천 명을 호령하더니 이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허수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