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고양이 도시의 고양이 / 이재봉 친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휘리릭 지나간다 돌멩이를 던지자 지붕 위로 달아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고양이가 달 속에 숨어서 달려들 듯 차갑게 나를 노려본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12.09.23
겨울밤 겨울밤 / 이재봉 어머니, 오늘밤에 눈이 많이 내린답니다 별일 없으시죠? 그래, 난 괜찮다 아프지 마라 딸까닥 어머니, 어머니, 목젖까지 차오르는데 전화가 끊어지고 마당귀엔 참았던 그리움이 하얗게 쌓입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10.01.11
대나무 대나무 / 이재봉 숲 속을 걸어가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대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도 꼿꼿이 서 있는 게 아닌가 흙을 비집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있었다 작은 대나무, 큰 대나무, 부러진 대나무들이 뿌리를 서로 공유하며 푸르른 대밭을 이루고 있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9.12.01
줄 줄 / 이재봉 줄이 사무실에서 거래처로 관공서에서 은행으로 식당으로 하루 종일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 어디 한번이라도 줄 없 이 다닌 적이 있던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줄은 다시 나를 네트워크에 묶어 놓고 지구 끝까지 끌고 다닌다 거미 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버둥거리며 사는 세상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끈끈한 줄이 온 몸을 더욱 휘감는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9.01.01
싸락눈 싸락눈 / 이재봉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싸락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싸락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8.12.07
숭례문 숭례문 / 이재봉 남대문로를 지나가다 불에 탄 숭례문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단지 몇 개의 기와와 서까래뿐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돌아보는데 어느새 숭례문이 내 안으로 옮겨와 웅장하게 서 있다 수천 번을 지나갔어도 내게 가려져 있던 숭례문 시퍼런 하늘 아래 처마 끝 단청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8.02.23
인력시장 인력시장 / 이재봉 새벽 네 시 승합차가 굴러온다 ‘비닐하우스 일당 삼 만원’ 여자 셋이 올라탄다 승합차가 또 굴러온다 ‘아파트공사장 일당 칠 만원’ 남자 다섯이 올라탄다 첫 버스가 굴러온다 팔리다 남은 인부들이 올라탄다 나도 올라탄다 버스 의자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무엇이 허기 속으로 뚝 떨어진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7.02.15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 이재봉 간척지 갯벌에서 죽은 기러기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바싹 마른 날개가 푸석푸석 부스러지고 퉁퉁 불은 배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환경감시원이 검은 봉지에 주검을 거두어가자 갯지렁이들이 유품을 수습하고 있다 자식에게 날개를 내주고 차가운 골방에서 그리움에 떨다가 가슴으로 바다를 건너다 그만 갯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얼어 죽은 기러기 아빠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2.25
허수아비 허수아비 / 이재봉 한 쪽 팔을 잃은 허수아비 테만 남은 밀짚모자를 참새 떼가 건들고 지나가자 없어진 팔을 파르르 떨며 꽁꽁 언 땅에 우두커니 서 있다 구조조정으로 목이 잘린 박 선배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다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깨를 툭 치고 달아나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한때는 수 천 명을 호령하더니 이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허수아비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2.11
폭설 폭설 / 이재봉 해질 무렵 눈 덮인 산길에서 길을 잃었다 조심조심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찾는데 꿩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흔들며 눈 위를 걸어간다 ← ↓ → ↑ 꿩이 남긴 이정표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표시일까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