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고양이 도시의 고양이 / 이재봉 친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휘리릭 지나간다 돌멩이를 던지자 지붕 위로 달아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고양이가 달 속에 숨어서 달려들 듯 차갑게 나를 노려본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12.09.23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림일기책을 사주셨다. 난 그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림일기를 썼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손바닥만 한 일기책에 그림으로 기록을 했다. 언젠가 야외에서 미술수업을 할 때였다. 하늘에 파랑색을 칠하려고 크레파스 통을 다 뒤졌는데도 파랑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빨강색을 하늘에 칠했다. 며칠 후 내가 그린 『여름』이라는 그 그림이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은 파란하늘을 빨갛게 칠한 것을 보고 미술 실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사실은 파랑색이 없어서 빨간색을 칠한 것인데. 우리는 수많은 느낌 속에서 살고 있다. 가을하늘을 보면 적막하다는 느낌, 빈 들판을 보면 공허하다는 느낌, 바람 냄새를 .. 제2시집 [시간여행]/시인의 말 2010.05.27
부끄러움의 미학과 시적 승화를 통한 두 개의 공간 / 양수창 시인 이재봉 시인은 필자에게 다정한 이웃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재봉 시인과 남단의 진해에 사는 필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둘은 언제나 가까운 이웃이요, 늘 정이 오가는 이웃이며, 사이좋은 이웃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시인나라]에서 약 7년 전에 만났는데 그동안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직접 만나 지금까지 시에 대하여 교감하면서 절친하게 지내오고 있다. 이재봉시인은 매우 겸손한 시인이다. 그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언어를 절제하면서 서정의 세계를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시킬 수 있는 시를 창작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만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돌아볼 줄 알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는 아버지 고 이정호 시인에 .. 제2시집 [시간여행]/작품 해설 2010.05.27
사랑의 원근법 사랑의 원근법 / 이재봉 해가 지면 그 여자가 숨 쉬는 하얀 방으로 돌아옵니다 저녁을 먹고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듭니다 그 여자가 잠이 든 동안 나는 열린 창틈으로 벽 바깥쪽을 바라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별똥별이 아파트 옥상 피뢰침에 다닥다닥 붙어서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똥별이 피뢰침을 타고 내려와 내 몸 구석구석에 열꽃을 피웁니다 셀리, 셀리 제발 그 별꽃으로 이어 만든 동아줄로 나를 묶어 당신의 나라 파랗고 둥근 머언 나라로 나를 데려 가 주세요 늘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 하얗고 네모난 방 오늘 밤 나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타오릅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10.05.25
겨울밤 겨울밤 / 이재봉 어머니, 오늘밤에 눈이 많이 내린답니다 별일 없으시죠? 그래, 난 괜찮다 아프지 마라 딸까닥 어머니, 어머니, 목젖까지 차오르는데 전화가 끊어지고 마당귀엔 참았던 그리움이 하얗게 쌓입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10.01.11
대나무 대나무 / 이재봉 숲 속을 걸어가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대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도 꼿꼿이 서 있는 게 아닌가 흙을 비집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있었다 작은 대나무, 큰 대나무, 부러진 대나무들이 뿌리를 서로 공유하며 푸르른 대밭을 이루고 있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9.12.01
노을 노을 / 이재봉 친구들과 뛰어 놀다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께서 가마솥에 저녁밥을 짓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등 뒤에서 불을 쬐고 있는데 들판에서 보았던 붉은 노을이 아궁이 속에서 타닥타닥 타고 있었습니다 밥솥을 열자 작은 별들이 고슬고슬 떠올랐습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9.10.11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 이재봉 탁 트인 정상에 오르니 길의 시작과 끝이 보인다 좌우 양쪽이 다 보인다 나이를 먹는 건 산을 오르는 것 오르면 오를수록 보이지 않던 나무가 보이고 들리지 않던 새 소리가 들린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나뭇잎 사이의 여백이 보이고 내 인생의 좌우도 보인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9.09.15
조수아나무 조수아나무 / 이재봉 사막에서 만난 조수아나무 논에 벼를 심어놓은 것처럼 일정하게 서서 간밤에 내린 이슬방울을 받아먹는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서로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이는 여백이 아니라 생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런 것인가 그로부터 너무 가깝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어져도 안 되는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9.08.15
외딴집 외딴집 / 이재봉 잠자리 한 마리 필라멘트가 끊긴 백열등에 앉아 졸고 있다 살그머니 꼬리를 건들자 뽀얗게 먼지가 되어 내려앉는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9.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