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석강 *채석강 / 이재봉 나는 기억의 퇴적층이다 나였던 것들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던 나도 몰래 살구를 따다 줄행랑을 치던 나도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던 나도 찔레꽃덤불에 앉아 펑펑 울던 나도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 지금 어디에도 나였던 것들은 없다 수천 년 동안 바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채석강처럼 *채석강: 전북 변산반도에 있는 층암절벽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6.03.01
0 0 / 이재봉 주먹만 한 금성이 양의 나라도 아니고 음의 나라도 아닌 낮과 밤의 경계에서 반짝인다 점 점 하늘이 어두워지자 수많은 별들이 작고 둥글게 점을 찍으며 무한히 뻗어나간다 00000000000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5.12.01
점 점 / 이재봉 바람에 날린 민들레 씨앗 씨앗 한 점이 돋아나 꽃봉오리가 피고 꽃봉오리가 떨어져 씨앗이 되고 씨앗이 구름 위로 날아가 별꽃이 되고 별꽃이 떨어져 다시 한 점 씨앗이 되고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5.09.01
모든 것은 우연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 이재봉 그날 전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오후 다섯 시에 모란역에 내리지 않았더라면 봄바람을 피해 모란꽃 뒤에 숨지 않았더라면 그 꽃 속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스카부로추억을 부르며 시장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그 노래가 사랑이 되어 그녀의 가슴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수줍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전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4.10.01
배터리가 나간 방 배터리가 나간 방 / 이재봉 배터리가 나간 방은 고요하다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조차 조용하다 배터리가 달린 기구란 기구는 모두 서있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이것들을 볼 수 있는 내 눈 뿐이다 시계가 3시 15분에서 멈춰 있다 3시 15분이 어제 오후인지 내일 새벽인지 분간할 수 없다 어제와 내일은 언어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시간은 영원히 흐르는 강물과 같다 배터리가 나가고 시간이 멈추자 나는 다시 무한의 시간 속에 누워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본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4.09.01
베텔기우스 *베텔기우스 / 이재봉 초저녁 남쪽 하늘에서 번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베텔기우스가 폭발을 하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부신 먼지구름 속에서 새 별들이 쏟아진다 둥근별은 떨어지면서 달이 되어 하늘에 떠 있고 막대별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다 방울별은 밭에 떨어지는 순간 토마토가 되었고 돌별은 어느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금이 되었다 *베텔기우스; 오리온자리의 알파별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4.01.01
웜 홀 웜 홀 / 이재봉 차를 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물에 빠지듯 그 불빛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 을 다해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닫혔다 다시 열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좁고 어두운 터널을 빠 져나오자 차창 밖으로 들판이 보였다 인적 없는 들판을 계속 달렸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3.08.01
유성우 유성우 / 이재봉 지구 주위를 맴돌다 사랑에 빠졌는지 뜨겁게 지구로 돌진하며 별똥을 쏟아놓는다 먼 길을 가던 기러기 떼가 킬킬거리며 저들도 흰 똥을 쏟아놓는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3.07.07
은하 은하 / 이재봉 초음파로 태아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갓 생긴 별 하나가 양수를 들이마시며 은하 한 가운데를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커서로 손가락 끝을 건드리자 몇 억 광년 떨어진 그 곳에서 헤엄을 치다말고 두 눈을 깜박거린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1.08.01
흙 흙 / 이재봉 감자 줄기를 걷어내다가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흙 속을 들여다보니 온갖 벌레들이 진흙 속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 어디서 나왔을까 저 벌레들 손톱만한 콩벌레를 건드리자 또르르 가랑이 사이로 굴러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괜히 가슴이 찡해온다 태고의 진흙 속에서 콩벌레도, 감자도, 우리도 한 뿌리가 아니었던가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