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 70

외줄타기

외줄타기 / 이재봉 햇빛 쏟아지는 단옷날 오후 줄광대가 외줄을 타고 있다 한 발 한 발 뒤뚱거리며 걸어가다 그만 중간쯤에서 멈추어 선다 줄광대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발버둥 친다 안 돼! 안 돼! 어릿광대의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멈추어 서면 안 돼! 앞으로 나아가야 해! 줄광대의 삶이 외줄에 매달려 합죽선 아래서 펄럭거린다

굴뚝새

굴뚝새 / 이재봉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굴뚝새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다시 나가려고 발버둥친다 양 옆 창문이 다 열려 있는데도 계속해서 앞 유리창 쪽 으로만 날갯짓을 한다 승객들은 숨죽이고 앉아 굴 뚝새의 안전 탈출을 기원했지만 끝내 앞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진다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내 검찰의 조사가 시 작되자 주위사람들에게 부끄럽다며 신발 한 짝만 남겨두고 17층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앞으로 나는 것 밖에 모르는 굴뚝새 같은 사내

김씨

김씨 / 이재봉 정신병동 301호실 김씨가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타월을 쌓고 있다 김씨는 세상 모든 것을 쌓는다 벗어던진 환자복도 쌓고, 마시고 난 우유팩도 쌓고, 간호사가 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소독내도 쌓고, 옆 환자가 중얼거리는 흘러간 노래도 쌓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쌓는다 5인실 공간에서 모든 것을 쌓으며 늙어가는 김씨 남은 것이 라곤 오직 뇌를 다치던 날 오후까지 아파트 공사장에서 벽돌을 쌓던 기억 뿐 김씨 옆에 나란히 앉아 눈길을 건네자 울컥거리며 다시 벽돌을 쌓는다

지진

지진 / 이재봉 땅이 이렇게 쉽게 갈라질 줄 몰랐다 집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아내도 자식도 다 떠내려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폐허만 남았다 땅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안락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땅과 집을 제 것인 것처럼 알고 살지만 내가 산 땅이라고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지은 집이라고 내 것이 아니다

명왕성

명왕성 / 이재봉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태양계에서 제외당한 명왕성 ‘난쟁이별 134340’이라고 적힌 새 이름표를 큰 별들이 건들고 지나가자 기울어진 어깨를 더욱 실긋거리며 꽁꽁 언 태양계 끄트머리를 돌고 있다 열한 번째 면접시험을 보는 사내 키가 작은 게 부끄러워 면접실로 들어가자마자 얼른 의자에 앉는, 앞가슴에 ‘응시번호 137번’을 단 사내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말고 의자에 파묻힌 제 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암흑물질은 그리움이다

암흑물질은 그리움이다 / 이재봉 아내와 중미산 천문대를 올라가고 있는데 기러기 떼가 끼룩거리며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 자세히 바라보니 별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를 끌어당기며 날아간다 지구 속의 기러기 우주 속의 별 저들 사이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존재한다 태고의 구름 속에서 별이 되지 못하고 우주를 떠도는 육체가 없는 암흑물질이

십자가

십자가 / 이재봉 문이 열리고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나타나자 길 잃지 않은 아흔 일곱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하여 손가락 열 개를 뾰족이 세우고 십자가 가까이 모여든다 길 잃은 셋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맨 뒤에 앉아 이 곤궁한 하루를 벗어나게 해달라며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미사가 끝나고 사제가 옆문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길 잃은 셋은 끝내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첨탑 위의 빈 하늘만 쳐다본다 십자가는 너무 멀리 있다 십자가는 너무 높이 있다 길 잃은 셋이 찾아 가기에는

순이

순이 / 이재봉 카페에서 만난 입술에 흉터가 있는 여자 아카시아 나무에서 떨어져 입술이 찢어졌던 그 순이가 아닐까 봄이 오면 아카시아 꽃으로 허기를 채우던 순이 우리집에서 동생을 업어주며 끼니를 해결하던 순이 그 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봉제공장에 다닌다는 소문도 들렸고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한다는 말도 들렸고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순이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여자가 아닐까 카페에서 만난 입술에 흉터가 있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