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날 아침 경칩날 아침 / 이재봉 스톱, 스톱 개구리가 튀어나와요 아내의 비명 소리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반대편 찻길에서 꽝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헬멧을 쓴 사내가 도로 한 가운데로 튕겨 나온다 위태위태하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 아침 햇살을 잘게 부수며 앰뷸런스가 달려온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4.07.07
황혼 황혼 / 이재봉 평생 스웨터 두 벌로 겨울을 나던 할머니 때가 찌든 스웨터를 입고 멍하니 지는 해만 바라본다 스웨터를 갈아입자며 장롱에서 깨끗한 스웨터를 꺼내자 생각에 잠기며 내게 말한다 올 겨울은 못 보겠지....... 할머니는 지는 해만 바라보며 또 생각에 잠긴다 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2014.06.01
복사꽃 복사꽃 / 이재봉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봤어요 눈부시게 계곡을 물들이고 있는 희고 붉은 꽃무리를 생각나요 당신은 길가에 피어 있는 복사꽃을 보고 낡은 벽지 문양 같다며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당신은 짧은 꽃무늬 치마를 펄렁거리며 날 유혹했지요 어제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알았어요 인생이란 것도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낡은 벽지라는 것을 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2014.04.01
적막강산 적막강산 / 이재봉 네가 떠난 텅 빈 마을 혼자서 밤길을 걸어가는데 인기척에 놀란 개구리가 갑자기 울음소리를 멈춘다 완벽한 적막의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 반짝반짝 개골개골 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2014.02.01
베텔기우스 *베텔기우스 / 이재봉 초저녁 남쪽 하늘에서 번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베텔기우스가 폭발을 하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부신 먼지구름 속에서 새 별들이 쏟아진다 둥근별은 떨어지면서 달이 되어 하늘에 떠 있고 막대별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다 방울별은 밭에 떨어지는 순간 토마토가 되었고 돌별은 어느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금이 되었다 *베텔기우스; 오리온자리의 알파별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4.01.01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 이재봉 번개가 피뢰침을 타고 내려오듯 사랑도 눈을 타고 내려온다 와서 다짜고짜 불을 질러놓고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다가 마침내 눈을 멀게 한다 제3시집 [난쟁이별]/사랑은어떻게 2013.11.01
느티나무 느티나무 / 이재봉 산길을 내려오는데 길바닥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먹고 있었습니다 슬그머니 다람쥐 앞으로 다가가자 은빛 꼬리를 흔들며 느티나무 위로 달아났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옆집 할아버지에게 쫓겨 느티나무로 달아난 적이 있습니다 썩은 느티나무 구멍에 몸을 숨기고 태아처럼 오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멀리서 어머니 날 부르는 소리가 잠속까지 울렸습니다 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2013.10.01
사랑은 물질이다 사랑은 물질이다 / 이재봉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질이 작용한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물질 때문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만들 듯 세로토닌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사랑을 만든다 사랑은 물질의 작용에 따라 행동한다 너무 뜨거우면 기체가 되어 사라지고 너무 차가우면 고체가 되어 굳어버린다 제3시집 [난쟁이별]/사랑은어떻게 2013.09.01
웜 홀 웜 홀 / 이재봉 차를 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물에 빠지듯 그 불빛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 을 다해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닫혔다 다시 열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좁고 어두운 터널을 빠 져나오자 차창 밖으로 들판이 보였다 인적 없는 들판을 계속 달렸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3.08.01
유성우 유성우 / 이재봉 지구 주위를 맴돌다 사랑에 빠졌는지 뜨겁게 지구로 돌진하며 별똥을 쏟아놓는다 먼 길을 가던 기러기 떼가 킬킬거리며 저들도 흰 똥을 쏟아놓는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3.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