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 70

경칩날 아침

경칩날 아침 / 이재봉 스톱, 스톱 개구리가 튀어나와요 아내의 비명 소리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반대편 찻길에서 꽝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헬멧을 쓴 사내가 도로 한 가운데로 튕겨 나온다 위태위태하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 아침 햇살을 잘게 부수며 앰뷸런스가 달려온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복사꽃

복사꽃 / 이재봉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봤어요 눈부시게 계곡을 물들이고 있는 희고 붉은 꽃무리를 생각나요 당신은 길가에 피어 있는 복사꽃을 보고 낡은 벽지 문양 같다며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당신은 짧은 꽃무늬 치마를 펄렁거리며 날 유혹했지요 어제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알았어요 인생이란 것도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낡은 벽지라는 것을

베텔기우스

*베텔기우스 / 이재봉 초저녁 남쪽 하늘에서 번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베텔기우스가 폭발을 하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부신 먼지구름 속에서 새 별들이 쏟아진다 둥근별은 떨어지면서 달이 되어 하늘에 떠 있고 막대별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다 방울별은 밭에 떨어지는 순간 토마토가 되었고 돌별은 어느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금이 되었다 *베텔기우스; 오리온자리의 알파별

느티나무

느티나무 / 이재봉 산길을 내려오는데 길바닥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먹고 있었습니다 슬그머니 다람쥐 앞으로 다가가자 은빛 꼬리를 흔들며 느티나무 위로 달아났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옆집 할아버지에게 쫓겨 느티나무로 달아난 적이 있습니다 썩은 느티나무 구멍에 몸을 숨기고 태아처럼 오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멀리서 어머니 날 부르는 소리가 잠속까지 울렸습니다

웜 홀

웜 홀 / 이재봉 차를 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물에 빠지듯 그 불빛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 을 다해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닫혔다 다시 열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좁고 어두운 터널을 빠 져나오자 차창 밖으로 들판이 보였다 인적 없는 들판을 계속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