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 70

외로움은 본질이다 - 진시황에게

외로움은 본질이다 / 이재봉 -진시황에게 당신의 능을 구경하다가 봤어요 수천의 병사들을 양 옆에 세워놓고 누워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랬군요 외로움이 싫어서 죽어서도 병사들을 곁에 두고 지내온 거였군요 수천의 병사들을 곁에 두고도 모자라 광대와 악사들까지 불러들인 거였군요 하지만 병사들의 눈빛을 봐요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요 혼자 서서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어요 당신은 죽어서도 깨닫지 못했군요 둘이 있어도 외롭고 셋이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

봄바람

봄바람 / 이재봉 지난봄이었습니다 누이와 놀이공원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누이는 회전목마를 타자며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누이의 치마가 가슴 위로 치솟았습 니다 누이는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얼른 손수건으로 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젖은 눈 사이로 봄바람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 창가에 서서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 이재봉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로 빨간 우산을 쓴 사람이 지나간다 그 옆으로 검정 우산을 쓴 사람이 지나간다 도로 한 가운데로 주황색 우비를 입은 퀵서비스가 빗방울을 튕기며 지나간다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데도 아무도 젖는 사람이 없다 나만 혼자 쓸쓸히 창가에 서서 비에 젖는다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내가 너를 사랑해서 비에 젖는다

비워내기

비워내기 / 이재봉 필요 없는 돌을 다 떼어내야만 부처님의 참 모습이 나온다며 석공은 돌을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그는 정을 들고 모든 것을 떼어낸다 눈가에 붙은 오만도 떼어내고 가슴에 박힌 원망도 떼어내고 뱃살에 붙은 욕심도 떼어낸다 이제 그만 됐다며 할머니가 재촉하자 이제야 돌 속에서 부처를 찾았다며 부처님처럼 빙긋이 웃는다

정 / 이재봉 어느 날 아침 앉은뱅이책상을 찾기 위해 서재로 갔더니 책상 이 놓여있던 귀퉁이에 거미 한 마리 그물을 치고 있을 뿐 책 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쉬워 다시 돌아보니 거기 책상이 있던 자리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천 번을 보았어 도 보이지 않던 책상이 내 가슴 속에 오롯이 놓여 있었습니 다 책상이 없어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익숙한 것은 있을 때 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인다는 것을

흙 / 이재봉 감자 줄기를 걷어내다가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흙 속을 들여다보니 온갖 벌레들이 진흙 속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 어디서 나왔을까 저 벌레들 손톱만한 콩벌레를 건드리자 또르르 가랑이 사이로 굴러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괜히 가슴이 찡해온다 태고의 진흙 속에서 콩벌레도, 감자도, 우리도 한 뿌리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