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교 인천대교 / 이재봉 철탑을 보자 나는 날고 싶었다 다리가 없어지고 공중에 하얀 비탈길이 생겼다 나는 그 길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 는데 브레이크 페달이 보였다 날아가는 자동차에 왜 브 레이크가 필요한지 의아했다 그때마다 또 다른 내가 달 려와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우리 다음 생애에 여기 다시 오면 날아올라요 이 다리를 버리고 저 하얀 비탈길로 새처럼 가볍게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0.10.11
KTX KTX / 이재봉 200킬로에서 250킬로로, 250킬로에서 300킬로로 가속 이 붙자 속도에 취한 고속열차가 긴 터널 속으로 빠져 들 어간다 차창 밖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열차 안의 시 간은 느리게 지나간다 터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시 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나의 옛 고목 나무가, 고샅길에서 구슬치기하던 나의 옛 친구들이, 나의 옛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나의 옛 어머니와 내가 보인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0.09.09
군중 군중 / 이재봉 누우떼가 우두머리를 따라 마라강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우들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서로 밟혀 다리가 부러져도 다시 벌떡 일어나 강물에 뛰어드는 이유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대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자 누군가 구호를 따라 외치며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광경을 마포대교를 지나가다 보았다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0.08.31
별 별 / 이재봉 깊은 밤 계곡을 내려오다가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물속을 들여다보니 물고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산란을 한다 하늘을 보니 갓 태어난 별들이 은하에서 물장구치다 말고 물끄러미 계곡을 내려다본다 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2010.07.17
슛 슛 / 이재봉 후반 41분 박지성이 건네준 공을 이동국이 받는다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 슛~ 오른발로 걷어찬 공이 골키퍼 다리를 맞고 들고 있는 맥주잔 위로 떨어진다 “국내 첫 정지궤도 위성 천리안 발사 응원하던 이모씨 한강에 뛰어들어“ 질질 흘러내리는 맥주 사이로 자막이 지나간다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0.07.07
당산철교 당산철교 / 이재봉 이른 아침 2호선 전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가는데 책가방을 맨 학생 셋이 달리는 전철 안에서 뛴다 그 뒤를 작업복 차림의 중년 둘이 또 뛴다 철교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리 셋이 줄지어 간다 나도 뒤따라가 본다 느릿느릿 가볍게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0.07.01
귀지파기 귀지파기 / 이재봉 아내가 귀지를 파 준다 사각사각 도토리 갉아 먹는 소리에 사르르 잠이 드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간지럼을 타며 아내의 손을 잡는다 나는 살며시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 팔짱을 낀다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0.06.19
이 순간 이 순간 / 이재봉 대학병원 중환자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여자가 누워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두 다리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누군지 한 사람 달려가고 한 사람 달려왔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산소호흡기로 들어 마신 마지막 공기방울이 눈 속에 동그라니 떠 있다 울음소리와 함께 주검이 영안실로 내려가는데 바로 그때 반대편 신생아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10.05.31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이재봉 이 비 그치고 가로수 잎새마다 초록빛이 물들면 사랑보다 아름다운 그리움을 간직하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봄볕이 들면 그리하여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꽃망울이 터지면 나도 그리움으로 물든 꽃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제3시집 [난쟁이별]/외로움은본질 2010.03.07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 이재봉 은행 창구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대기표를 잃어버렸다 37번, 37번 손님, 분명 내가 은행원 앞에 서 있는데도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번호만 불렀다 은행에서 나와 서점 앞을 지나가다 책 한 권을 샀다 수표 뒷면에 이름을 쓰고 계산원에게 건 내자 그녀는 내 이름이 있는데도 주민등록번호를 쓰라고 했다 번호가 생각이 안 나 머무적거리는데 문득 맞은편 거울 속에 내가 거기, 아득한 풍경처럼 서 있다 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2008.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