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 70

가장 아름다운 빛

가장 아름다운 빛 / 이재봉 빨간 색유리를 통해서 빛의 세계를 본다 뜨락에 피어 있는 하얀 국화가 빨간 장미로 보이고 그 옆의 노란 분꽃이 빨간 백일홍으로 보인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빛의 세계를 본다 모든 것이 색유리에 붙잡혀 빨갛게 보이는데 저 멀리 강가에서 푸르스름한 불빛이 색유리를 뚫고 들어온다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고 대신 죽은 어머니의 혼 불이

역삼역에서

역삼역에서 / 이재봉 전동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좁은 승강장 안에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자판기 돈 집어먹는 소리만 긴 침묵의 틈에서 새어 나왔다 신문을 사려고 바둑판처럼 생긴 보도블록을 밟으며 신문판매대 쪽으로 걸어가는데 바둑무늬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만 서고 말았다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내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분명 내 발인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설날 아침

설날 아침 / 이재봉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리는데 요즘 힘들지? 하시면서 쉰이 넘은 자식한테 세뱃돈을 주신다 평생 자식들에게 주시기만 한 어머니 너는 어머니에게 단 한 번이라도 주어 본 적이 있느냐 뼛속까지 다 내어주고도 모자라 마지막 남은 쌈짓돈까지 꺼내주고 빈껍데기만 하얗게 남은 어머니 손자가 과자를 달라고 떼를 쓰자 먹고 있던 과자를 슬그머니 손자 입에 넣어 주신다

초등학교동창회

초등학교동창회 / 이재봉 종각역을 나와 옛 종로서적 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재봉아! 운동회 때마다 백미터 달리기에서 늘 꼴찌를 하던 근수다 우리는 뒷골목 낯선 장소에 모여 삼만 원씩 회비를 내고 서로 악수를 나누며 이것저것 묻는다 연봉은 얼마나 되니? 아파트는 몇 평이야? 애들은 어느 대학에 다녀? 그래, 나랑 똑같구나 그제야 친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연락처를 알았으니 자주 만나자며 술잔을 비운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 이재봉 그날 전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오후 다섯 시에 모란역에 내리지 않았더라면 봄바람을 피해 모란꽃 뒤에 숨지 않았더라면 그 꽃 속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스카부로추억을 부르며 시장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그 노래가 사랑이 되어 그녀의 가슴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수줍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전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배터리가 나간 방

배터리가 나간 방 / 이재봉 배터리가 나간 방은 고요하다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조차 조용하다 배터리가 달린 기구란 기구는 모두 서있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이것들을 볼 수 있는 내 눈 뿐이다 시계가 3시 15분에서 멈춰 있다 3시 15분이 어제 오후인지 내일 새벽인지 분간할 수 없다 어제와 내일은 언어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시간은 영원히 흐르는 강물과 같다 배터리가 나가고 시간이 멈추자 나는 다시 무한의 시간 속에 누워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본다

낱말찾기

낱말 찾기 / 이재봉 스타박스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두어 시간을 떠들고 나니 입도 아프고 귀도 아팠습니다 우리는 원형 탁자에 신문을 펼쳐 놓고 좋아하는 낱말에 동그라미를 그었습니다 사랑, 평화, 행복, 영원, 기쁨, 부자....... 해는 지고 별들이 내려와 찻잔 속에서 졸고 있을 때까지 우리는 끝내 눈길 주위에서 마주치는 그 흔한 낱말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미움, 고통, 불행, 이별, 슬픔, 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