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 70

시간여행

시간여행 /이재봉 골짜기 은수원나무숲 사이로 살구나무가 보였다 나무 위에 올라가 몰래 살구를 따고 있는데 옆 집 할아버지가 긴 작대기를 들고 쫓아왔다 황급 히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골짜기 위로 눈이 없는 새떼들이 우르르 은사시 나무숲을 흔들며 시간을 거슬러 날아갔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다 두 시에 호텔 커피숍 에서 만나기로 한 로제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도 새떼들의 뒤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날아갔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하얀 호텔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컴퓨터하다 졸기

컴퓨터하다 졸기 / 이재봉 뜨거운 사막 시커먼 미군 병사들이 총을 쏘며 달려온다 죽은 시늉을 하며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긴다 누가 내 안으로 들어와 총알을 밀어 넣는다 가슴 한편이 움푹 파이면서 문득 봉숭아 한 그루 붉게 터지고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마우스로 파일을 지운다 나도 상처 난 가슴에 마우스를 갖다 댄다

오해

오해 / 이재봉 소파 위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가 이웃집 고양이를 보고는 꼬리 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그러자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이 은백색 털을 꼿꼿이 세우고 째려본다 계속해서 강아지가 꼬 리를 흔들며 인사를 하자 그것을 고양이는 강아지가 저를 공격 하는 줄만 알고 꼬리를 두울둘 말아 벽장 속으로 숨고 만다 여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시작되었는데도 강아지는 처음 모 습 그대로 소파에 서서 액자 속에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꼬리 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註)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는 무서운 상대가 나타날 때 꼬리를 흔든다.

그날

그날 / 이재봉 키 큰 은사시나무 사이로 바람이 공작 날개를 펴며 지나가고 오월의 햇살은 가장귀에서 푸르게 돋아났다 오후 세 시, 어머니 전화를 받고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희미하게 누워있었다 뚜우 소리를 내며 심전도가 멎자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동자가 뚝 떨어졌다 순간 모든 전원이 꺼지면서 땅이 무너지고 나무가 쓰러졌다 한 참을 울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다가 그만 산이 되어 산처럼 앉아 있었다

하이드파크

하이드파크 / 이재봉 마블아치 아래서 회색빛 터키인이 기타를 치고 있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가슴을 불쑥 내밀고 동전을 던진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라일락 꽃길을 걸으며 잔디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은빛 머리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소녀와 흑발의 소년이 봄 햇살이 하얗게 뿌려진 켄트지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다 그 옆에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비둘기 한 쌍이 그림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구구구 노래를 한다

오랑캐꽃

오랑캐꽃 / 이재봉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선전포고도 없이 앞 산골짜기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대장 인 왕오랑캐가 돌격 명령을 내리며 노란 신호탄을 발사 하 자 뒤따르던 서울오랑캐 남산오랑캐 태백오랑캐 장백오랑 캐 갑산오랑캐 간도오랑캐 광릉오랑캐 금강오랑캐 졸방오 랑캐 투구오랑캐 각시오랑캐 노랑오랑캐 자주색오랑캐 얼 룩오랑캐 흰오랑캐 삼색오랑캐 민둥오랑캐 고깔오랑캐 단 풍오랑캐 둥근털오랑캐 잔털오랑캐 졸병들이 일제히 함성 을 지르며 형형색색의 수류탄을 던진다 오랑캐꽃들의 난장질에 산골짜기는 신음 소리 한 번 못 내 고 점령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