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왈라잇 트와일라잇 / 이재봉 해 지고 붉은 노을이 자줏빛으로 물들자 아이들이 바닷가에 모여 폭죽을 터트린다 타닥타닥 튀는 연기 속에 타다 남은 노을 한 잎이 보랏빛으로 피어오르고 동쪽 하늘에선 푸른빛이 도는 별들이 낮과 밤의 경계에서 서성거린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11.30
북극성 북극성 / 이재봉 저물녘 논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서 본 듯한 별 하나가 도랑 속에서 반짝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밝혀준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11.09
직진의 비애 직진의 비애 / 이재봉 쇠박새 한 마리 버스 안으로 들어와 밖으로 나가려고 파닥거린다 양 옆으로 창문이 열려있는데 계속해서 앞쪽으로만 날아가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다 필사적으로 돌진을 해보지만 유리창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혼자 헛되이 허우적거리다 쇠박새는 끝내 추락한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10.17
질주 질주 / 이재봉 자유로를 달렸다 가속페달을 마음껏 밟았다 텅 빈 도로 위를 자동차만 혼자서 빠르게 달려갈 뿐 나도, 언덕 너머 마을도,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 숲도 속도 속에 파묻혀 정지해 있다 모든 사물들이 속도에 붙들려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속도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이미 속도는 나와 내 차를 떠나 저 혼자의 힘으로 무섭게 내달리고 있다 나는 그만 자유로에 갇히고 말았다 무한으로 내달리는 속도의 한 가운데서 꼼짝 못하고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10.09
호박꽃 호박꽃 / 이재봉 이른 아침 아파트 뒷산을 오르는데 길가 풀숲에서 어머니 냄새가 난다 가만히 덤불 속을 헤치자 노란 호박꽃이 단내를 풍기며 벌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언제 곱게 화장했던 적이 있었을까 평생 단내를 달고 사신 어머니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느라 시름시름 잎이 지고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저 호박꽃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9.30
부르고뉴의 노을 부르고뉴의 노을 / 이재봉 파리 리용역에서 스위스 로잔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는 내게 일상의 언어를 묶어 놓고 붉게 물든 부르고뉴의 평원을 달렸다 디종역을 통과할 즈음 노을 한 쪽이 내려와 눈 속에서 타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눈 속을 바라보다 끝내 나는 그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기차가 로잔으로 가는 동안 그녀의 눈 속에서 타고 있는 저녁 해를 꼭꼭 매어 두고 싶었다 매어 둔 저녁 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싶었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09.10
여름날 여름날 / 이재봉 잠자리 한 쌍이 얼러붙어 물속에 잠긴 풀잎을 흔든다 멱을 감던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바사삭거리며 암컷 날개 한쪽이 부서진다 그러자 수컷이 다친 암컷 을 업고 강둑으로 날아간다 아이들이 물 속에서 뛰어나와 달리다가 한 아이가 넘 어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 강둑길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아버지께서 추억 속으로 걸어가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8.27
열대야 열대야 / 이재봉 바퀴벌레 한 마리가 책상 밑에서 기웃거린다 볼펜 끝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더듬이를 방바닥에 깔고 미동도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손가락 사이로 으스러진 살점이 튕겨 나온다 죽은 바퀴벌레가 나를 지하석실로 운구해 간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8.21
빛 빛 / 이재봉 은광(銀光)의 비늘을 번뜩이며 은사시나무 사이로 몰려다니다 초록바다가 바람에 출렁이자 희끗희끗 속살을 내보이며 골짜기 아래로 헤엄쳐가는 멸치 떼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7.24
포장마차 포장마차 / 이재봉 늦은 밤 테헤란로 거리에 훤하게 집어등 밝히고 고깃배들이 떠 있다 퇴근하던 사람들이 불빛 아래 모여 앉아 가슴 한 구석에 닻을 내리고 한 잔 술에 울다가 웃다가 만선의 꿈을 건져 올리는데 지나가던 갈매기 한 마리 오징어 위에 내려앉아 같이 울고 웃는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5.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