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 70

질주

질주 / 이재봉 자유로를 달렸다 가속페달을 마음껏 밟았다 텅 빈 도로 위를 자동차만 혼자서 빠르게 달려갈 뿐 나도, 언덕 너머 마을도,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 숲도 속도 속에 파묻혀 정지해 있다 모든 사물들이 속도에 붙들려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속도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이미 속도는 나와 내 차를 떠나 저 혼자의 힘으로 무섭게 내달리고 있다 나는 그만 자유로에 갇히고 말았다 무한으로 내달리는 속도의 한 가운데서 꼼짝 못하고

부르고뉴의 노을

부르고뉴의 노을 / 이재봉 파리 리용역에서 스위스 로잔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는 내게 일상의 언어를 묶어 놓고 붉게 물든 부르고뉴의 평원을 달렸다 디종역을 통과할 즈음 노을 한 쪽이 내려와 눈 속에서 타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눈 속을 바라보다 끝내 나는 그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기차가 로잔으로 가는 동안 그녀의 눈 속에서 타고 있는 저녁 해를 꼭꼭 매어 두고 싶었다 매어 둔 저녁 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싶었다

여름날

여름날 / 이재봉 잠자리 한 쌍이 얼러붙어 물속에 잠긴 풀잎을 흔든다 멱을 감던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바사삭거리며 암컷 날개 한쪽이 부서진다 그러자 수컷이 다친 암컷 을 업고 강둑으로 날아간다 아이들이 물 속에서 뛰어나와 달리다가 한 아이가 넘 어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 강둑길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아버지께서 추억 속으로 걸어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