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 70

진달래꽃

진달래꽃 / 이재봉 비 오는 봄날 노래방에 갔습니다 4.4조로 내리는 봄비에 맞춰 소월의 진달래꽃을 부르는데 한 여자가 화면 속에서 걸어 나와 탬버린을 흔듭니다 경쾌한 7.5조의 율동 느린 내 노래로는 그 여자의 율동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여자가 진달래꽃을 흩뿌리며 화면 속으로 사라집니다 언제나 반박자 느린 내 사랑법 머리 위에 꽃비가 또 하염없이 내립니다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 이재봉 간척지 갯벌에서 죽은 기러기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바싹 마른 날개가 푸석푸석 부스러지고 퉁퉁 불은 배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환경감시원이 검은 봉지에 주검을 거두어가자 갯지렁이들이 유품을 수습하고 있다 자식에게 날개를 내주고 차가운 골방에서 그리움에 떨다가 가슴으로 바다를 건너다 그만 갯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얼어 죽은 기러기 아빠

허수아비

허수아비 / 이재봉 한 쪽 팔을 잃은 허수아비 테만 남은 밀짚모자를 참새 떼가 건들고 지나가자 없어진 팔을 파르르 떨며 꽁꽁 언 땅에 우두커니 서 있다 구조조정으로 목이 잘린 박 선배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다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깨를 툭 치고 달아나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한때는 수 천 명을 호령하더니 이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허수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