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총새 물총새 / 이재봉 서해대교에서 만난 물총새 한 쌍 상처 입은 수컷을 암컷이 등에 업고 바다 위를 날아간다 화물트럭을 몰던 남편이 병으로 앓아눕자 남편 대신 운전대를 잡은 아내, 주렁주렁 링거를 단 남편을 운전석 뒤에 태우고 오늘도 고속도로를 날아가는 저 물총새 부부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5.31
진달래꽃 진달래꽃 / 이재봉 비 오는 봄날 노래방에 갔습니다 4.4조로 내리는 봄비에 맞춰 소월의 진달래꽃을 부르는데 한 여자가 화면 속에서 걸어 나와 탬버린을 흔듭니다 경쾌한 7.5조의 율동 느린 내 노래로는 그 여자의 율동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여자가 진달래꽃을 흩뿌리며 화면 속으로 사라집니다 언제나 반박자 느린 내 사랑법 머리 위에 꽃비가 또 하염없이 내립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6.05.27
낮달 낮달 / 이재봉 성묘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누가 내 뒤를 따라온다 돌아보니 하얀 낮달이 나를 내려다본다 아버지 내가 걱정이 되는지 눈을 감지 못하고 산등성이까지 내려와 길을 밝혀주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6.04.29
장날 장날 / 이재봉 행성처럼 빙빙 도는 뻥튀기 앞에서 아이들이 부풀기를 기다린다 아저씨, 꿈도 튀길 수 있어요? 그럼 열배로 튀길 수 있지 순간 부푼 꿈이 펑하고 튀겨지면서 기다란 망태기 속으로 꽃잎 같은 팝콘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제 키보다 큰 팝콘 한 자루를 가슴에 안고 아이들이 환히 웃는다 눈 속에서 꽃이 핀다 하얀 꽃밭이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6.04.27
감자 감자 / 이재봉 재래시장 입구 도로 한 복판 멀리 노점상 단속반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자 수북이 쌓인 감자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기우는 햇살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체온보다 따스한 저 손길 금방이라도 노란 싹이 돋아날 것만 같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6.03.31
재개발지역 재개발지역 / 이재봉 지붕 한켠 낡은 거미줄에 낮달이 걸려 있다 거미는 그것이 먹이인 줄 알고 앞다리로 덮치다 그만 마당으로 떨어진다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바람벽으로 기어오르는 거미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빈 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서로 손을 꼭 잡고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이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6.03.19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 이재봉 간척지 갯벌에서 죽은 기러기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바싹 마른 날개가 푸석푸석 부스러지고 퉁퉁 불은 배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환경감시원이 검은 봉지에 주검을 거두어가자 갯지렁이들이 유품을 수습하고 있다 자식에게 날개를 내주고 차가운 골방에서 그리움에 떨다가 가슴으로 바다를 건너다 그만 갯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얼어 죽은 기러기 아빠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2.25
허수아비 허수아비 / 이재봉 한 쪽 팔을 잃은 허수아비 테만 남은 밀짚모자를 참새 떼가 건들고 지나가자 없어진 팔을 파르르 떨며 꽁꽁 언 땅에 우두커니 서 있다 구조조정으로 목이 잘린 박 선배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다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깨를 툭 치고 달아나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한때는 수 천 명을 호령하더니 이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허수아비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2.11
폭설 폭설 / 이재봉 해질 무렵 눈 덮인 산길에서 길을 잃었다 조심조심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찾는데 꿩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흔들며 눈 위를 걸어간다 ← ↓ → ↑ 꿩이 남긴 이정표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표시일까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1.31
제야의 종 제야의 종 / 이재봉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머리를 곱게 빗고 기도하시던 할머니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데 거실 한가운데 액자에서 웃고 계신다 나는 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할머니가 쓰시던 참빗을 꺼내 헝클어진 생각을 빗는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6.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