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숭례문 / 이재봉 남대문로를 지나가다 불에 탄 숭례문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단지 몇 개의 기와와 서까래뿐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돌아보는데 어느새 숭례문이 내 안으로 옮겨와 웅장하게 서 있다 수천 번을 지나갔어도 내게 가려져 있던 숭례문 시퍼런 하늘 아래 처마 끝 단청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8.02.23
가을날 가을날 / 이재봉 일주문 밖 공터에서 전화를 기다리는데 하얀 코스모스들도 접시안테나처럼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응시한다 그러자 기러기들이 파란 화면에 ㅆㅆㅆ 문자를 날리며 느릿느릿 헤엄쳐 간다 기러기 저들도 이 가을이 쓸쓸한 것이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7.12.01
민들레 민들레 / 이재봉 강변역 승강장 콘크리트 바닥에 민들레가 웅크리고 있다 논둑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아이들이 살 곳은 어디에 있을까 꽃대를 세우고 두리번거리다 전동차가 들어오자 꽃씨를 내 뿜는다 전동차 안 가득 초록빛으로 싱싱해진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7.05.19
인력시장 인력시장 / 이재봉 새벽 네 시 승합차가 굴러온다 ‘비닐하우스 일당 삼 만원’ 여자 셋이 올라탄다 승합차가 또 굴러온다 ‘아파트공사장 일당 칠 만원’ 남자 다섯이 올라탄다 첫 버스가 굴러온다 팔리다 남은 인부들이 올라탄다 나도 올라탄다 버스 의자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무엇이 허기 속으로 뚝 떨어진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7.02.15
귀성 귀성 / 이재봉 연어들이 돌아온다 물푸레나무 거꾸로 서 있는 마을 앞 실개천이 그리워 추석이면 어김없이 그 먼 길을 되돌아오는 연어들의 행진 어머니 개울가로 걸어 나와 발갛게 웃으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6.10.01
모래성 모래성 / 이재봉 해질녘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는다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오자 모래성은 간데없고 낙타 한 마리가 금빛 바다에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파도를 타고 달려가 낙타의 등에 올라탄다 그들은 지금 낙타를 타고 인생이라는 신기루를 건너간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6.09.21
어머니의 손 어머니의 손 / 이재봉 먼지버섯 한 그루 참죽나무 밑에서 온몸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한다 홀씨를 뿜어내느라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 나가고 빈 거죽만 남았는데도 흐린 날이면 습관처럼 홀씨가 잘 날아가도록 쪼글쪼글한 몸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관절염 신경통에 두 손을 제대로 못 쓰는 어머니, 오늘처럼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이면 손가락 마디 마디가 쑤신다며 끙끙 앓다가도 손자 녀석이 배가 아프다며 칭얼거리자 검버섯이 수두룩한 손을 펴 손자의 배를 슬슬 쓸어 주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6.08.21
놀람 교향곡 놀람 교향곡 / 이재봉 한여름 밤 논길을 걸어가는데 개구리 한 마리가 우웩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핀다 걸음을 멈췄더니 이 논 저 논에서 우웩우웩 마침내 온 들판에서 팀파니를 두드리듯 와글와글 와글와글 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위에서 졸고 있던 별들이 놀라 그만 우두둑 무논으로 떨어진다 개구리들이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무논 속의 별들이 움직거린다 와글와글 반짝반짝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7.23
서울의 누우떼 서울의 누우떼 / 이재봉 누우떼가 달린다 마라강처럼 길게 뻗은 한강을 건너 파랗게 풀이 돋아난 강남으로 무섭게 질주하는 누우떼 어린 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사자에게 끌려가고 병든 동료가 지쳐 쓰러져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꼬리털 죽비로 제 등을 후려치며 땅을 구르며 달린다 먼지 자욱한 판교 신도시 붉은 띠의 철거민들이 진압대에 떠밀려 길바닥에 누워있는데도 초지를 손에 넣기 위해 아랑곳없이 내달리는 서울의 누우떼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6.30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 이재봉 들판을 지나 폐가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걸어온다 나를 이기면 너를 살려주겠다며 도깨비가 덤벼든다 할아버지는 도깨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쇠말뚝 같은 도깨비의 다리는 꿈쩍도 않는다 다시 발목을 잡고 오른쪽 어깨로 도깨비를 밀자 쿵 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 진다 구름 속에 숨어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보름달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도깨비는 씨름에서 졌으니 약속대로 너를 살려준다면서 돈과 보물을 내놓고는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눈부시고 눈부신 밤이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