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 70

어머니의 손

어머니의 손 / 이재봉 먼지버섯 한 그루 참죽나무 밑에서 온몸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한다 홀씨를 뿜어내느라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 나가고 빈 거죽만 남았는데도 흐린 날이면 습관처럼 홀씨가 잘 날아가도록 쪼글쪼글한 몸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관절염 신경통에 두 손을 제대로 못 쓰는 어머니, 오늘처럼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이면 손가락 마디 마디가 쑤신다며 끙끙 앓다가도 손자 녀석이 배가 아프다며 칭얼거리자 검버섯이 수두룩한 손을 펴 손자의 배를 슬슬 쓸어 주신다

놀람 교향곡

놀람 교향곡 / 이재봉 한여름 밤 논길을 걸어가는데 개구리 한 마리가 우웩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핀다 걸음을 멈췄더니 이 논 저 논에서 우웩우웩 마침내 온 들판에서 팀파니를 두드리듯 와글와글 와글와글 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위에서 졸고 있던 별들이 놀라 그만 우두둑 무논으로 떨어진다 개구리들이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무논 속의 별들이 움직거린다 와글와글 반짝반짝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서울의 누우떼

서울의 누우떼 / 이재봉 누우떼가 달린다 마라강처럼 길게 뻗은 한강을 건너 파랗게 풀이 돋아난 강남으로 무섭게 질주하는 누우떼 어린 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사자에게 끌려가고 병든 동료가 지쳐 쓰러져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꼬리털 죽비로 제 등을 후려치며 땅을 구르며 달린다 먼지 자욱한 판교 신도시 붉은 띠의 철거민들이 진압대에 떠밀려 길바닥에 누워있는데도 초지를 손에 넣기 위해 아랑곳없이 내달리는 서울의 누우떼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 이재봉 들판을 지나 폐가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걸어온다 나를 이기면 너를 살려주겠다며 도깨비가 덤벼든다 할아버지는 도깨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쇠말뚝 같은 도깨비의 다리는 꿈쩍도 않는다 다시 발목을 잡고 오른쪽 어깨로 도깨비를 밀자 쿵 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 진다 구름 속에 숨어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보름달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도깨비는 씨름에서 졌으니 약속대로 너를 살려준다면서 돈과 보물을 내놓고는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눈부시고 눈부신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