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목련꽃 / 이재봉 터미널 옆 장터에서 광대가 접시를 돌리는데 접시 하나가 빙그르 원을 그리며 빈 가지에 내려앉는다 흰 꽃송이를 가득 담고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23
개나리꽃 개나리꽃 / 이재봉 공원 벤치에 노숙자가 누워 있다 아직도 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알이 게슴츠레 풀려 있고 얼굴은 누렇게 떠 낙엽처럼 푸석거린다 봄이 왔다고 떠들어대는 개나리꽃의 성화에 겨우 눈을 뜬다 개나리꽃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어서 일어나라고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15
백목련 백목련 / 이재봉 청명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 앞 산자락에 하얀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하늘과 땅 중간에 피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문득 산을 바라보니 목련꽃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하얀 뭉게구름만 떠 있습니다 생이 얼마나 허무했으면 시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렇게 흰 목련구름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둥둥 떠 있을까요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08
부부 부부 / 이재봉 두 줄로 늘어선 철길 한쪽 눈으로 바라본다. 두 줄이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하나가 되어 눕는다 토라져 돌아앉은 그대 한쪽 눈을 감고 바라본다. 비로소 감은 눈 속으로 들어와 웃는 얼굴로 하나가 된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03.26
표주박 표주박 / 이재봉 내 아내는 속이 없다 한번은 그녀에게 비상금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며 씩 웃고는 지갑 속에 있는 비상금을 몽땅 털어 준다 내 아내는 이렇게 속이 없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5.03.19
봄 봄 / 이재봉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있는데 머리가 긴 담임선생님이 맞은편에서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치마 속에는 꽃이 가득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선생님이 지나가자 꽃을 한 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앞산에 꽃이 가득했습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3.12
눈사람 눈사람 / 아버지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갔다 오줌이 마려웠다 아버지는 눈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책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 지지 않았다 그만 오줌을 쌌다 “아빠 저기 눈사람이 있어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아빠를 닮았어요“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가자 큰아이가 소리를 친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5.03.09
막차 막차 / 이재봉 늦은 밤 당신을 기다리다 떠난 자리에 눈이 대신 내린다 하얀 눈송이들이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별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둥둥 떠 있다 텅 빈 막차는 차부로 향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나 역시 당신에게 어떤 별이 되어 빛날까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5.02.26
너를 보내고 너를 보내고 / 이재봉 네가 떠난 다음날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나는 겨울 숲으로 갔다 굴참나무 위에도 자작나무 위에도 하얗게 그리움이 쌓였다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그냥 너의 가슴속에 뛰어들어 백설이 되고 싶다 천년만년 지지 않는 킬리만자로의 백년설이 되고 싶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5.02.19
겨울숲 겨울 숲 / 이재봉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멧비둘기가 푸드덕 날개를 치며 날아간다 밤새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그만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그 밑을 지나가던 다람쥐가 깜짝 놀라 숲 속으로 달아난다 꼬리에 하얀 겨울 해를 매달고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5.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