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밥 / 이재봉 건너편 공사장 건물외벽에 매달린 사내 하얀 페인트를 뿜어낼 때마다 아카시아 꽃이 피어난다 중력을 무시한 채 가느다란 밥줄에 매달려 종일 페인트를 뿜어대다 건물 불이 꺼진 후에야 얼굴에 묻은 꽃가루를 밥알처럼 떼어낸다 문득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러 휘어진 나뭇가지에 오르던 배고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9.06.21
입춘 입춘 / 이재봉 담벼락 갈라진 틈을 비집고 올라온 새순들이 머리를 비비대며 봄을 기다린다 시샘 많은 바람이 담벼락을 흔들고 지나가자 덜덜거리며 수음을 한다 기다려야 한다 진짜 봄이 올 때까지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9.03.01
줄 줄 / 이재봉 줄이 사무실에서 거래처로 관공서에서 은행으로 식당으로 하루 종일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 어디 한번이라도 줄 없 이 다닌 적이 있던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줄은 다시 나를 네트워크에 묶어 놓고 지구 끝까지 끌고 다닌다 거미 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버둥거리며 사는 세상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끈끈한 줄이 온 몸을 더욱 휘감는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9.01.01
싸락눈 싸락눈 / 이재봉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싸락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싸락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겨울여행 2008.12.07
점묘 점묘 / 이재봉 해질녘 청소부 셋이 모여 낙엽을 태운다 툭툭 튀는 불길 속으로 지는 해가 타들어간다 타는 해가 데구르 굴러와 내 몸 속에서 또 빨갛게 타오른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8.11.25
단풍 단풍 / 이재봉 아버지 무덤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어머니 이제 그만 가시자고 하자 이놈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며 멀쩡한 잔디만 뜯어내신다 정말 그러네요 어머니 얼굴을 보니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드신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8.11.01
붉은 시월 붉은 시월 / 이재봉 이른 아침 외국인학교 정문 앞 스쿨버스가 단풍나무 아래 멈춰 서자 붉은 머리의 아이들이 버스에서 뛰어내려 데굴데굴 정문 앞으로 굴러간다 우우우 떨어지는 잎새들이 아이들 무동 타고 함께 굴러간다 제2시집 [시간여행]/가을여행 2008.10.03
앵두 앵두 / 이재봉 앵두나무 그늘에 앉아 한 여자를 생각했네 앵두같이 맑은 여자 앵두같이 작은 여자, 앵두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 그 여자가 내 머리위에서 빨갛게 익어가네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던 그 여자 제2시집 [시간여행]/여름여행 2008.08.05
춘몽 춘몽 / 이재봉 봄날 오후 창가에 앉아 르노아르의 그림을 본다 여자 셋이 다정스레 앉아 몸을 씻고 있다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한 여자가 물장난을 치며 나를 부른다 철벙대며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비릿한 물만 묻히고 돌아온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8.04.19
우수 우수 / 이재봉 버들가지 끝에 맺힌 물똥이 똥그르 못 속으로 떨어진다 물결이 빙글빙글 돌며 레코드판처럼 소릿결을 내자 놀란 송사리들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춤을 춘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8.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