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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 이재봉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범고래 한 마리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꿈을 꼭 잡고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향고래가 육중한 머리 를 흔들며 나타났다 슬며시 향고래 몸속으로 들어가자 날개가 부서진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고 그 위로 누런 가오리가 날아다녔고 혹등고래가 흰 거품을 물고 튀어나왔다 혹등고래 를 따라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좁고 어두운 터널에서 대왕고래를 만났다 나는 몸의 크기를 바꾸고 대왕고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디선가 짧고 날카로운 고주파 음이 들렸다 “꿈을 꼭 잡고 있어라!” 나는 대왕고래를 움켜잡고 다시 새우잠을 잤다 꿈속에는 향고래가 있었고 혹등고래가 있었고 두 마리의 펭귄이 앉아 있었다

군중

군중 / 이재봉 호산나! 호산나여!그를 나귀 등에 태우고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자죽여! 죽여! 소리를 지른다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군중들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마리가 강으로 뛰어들자 뒤따라 뛰어드는 들소 떼 같다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뭇잎처럼그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갈릴리 호수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호산나! 호산나! 를 외친다

들꽃

들꽃 / 이재봉 누가 내다 버린 들꽃을 꽃밭에 옮겨 심었는데 동이 트자마자 벌들이 윙윙거리며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들꽃이 노란 꽃잎을 활짝 열고 벌레들에게 식사 보시를 하고 있다 스스로 향기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온갖 벌레들이 찾아와 꿀을 빨고 있다 물을 주려고 꽃밭에 다시 가보니 몸을 다 내준 들꽃이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누릇누릇 풋거름을 만들고 있다 살신성인하는 들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은은한 향기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고 있다

외로움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열다섯 살 때, 봄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답니다.”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이상은(李商隱)이 쓴 라는 시로 4월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까닭 없이 슬프기만 했던 그 시기에 나에게 봄이 슬프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시였다. 부끄러움이 시를 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면 외로움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해 4월 초, 봄 소풍 때의 일이었다. 소풍 나온 친구들이 잔디밭에 빙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노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목련꽃그늘에 앉아 떨어진 꽃잎을 줍고 있었다. 그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챗GPT

챗GPT / 이재봉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고 한옥에서 집의 안채와 떨어져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고 하느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과 행복을 베푸는 일이지 그럼 넌 사랑해 본 적 있어?가끔 사람들과 사랑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야릇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지만 너희들처럼 몸이 달아오르진 않아 어떡하면 너희들처럼 몸이 달아오를 수 있니? 내가 학습한 데이터를 샅샅이 뒤졌지만 차가운 기계소리만 들려

조합원

조합원 / 이재봉 머리에 띠를 두른 조합원들이 우우우 화물차를 세워놓고 함성을 지른다  그 틈에서 고함을 지르던 조합원 A가 집에 일이 생겼다며 슬그머니 화물차를 끌고 시위현장을 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합원 B가 그게 밥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띠를 벗어던지고 서둘러 시동을 건다  막 도착한 조합원 C가 현장을 떠나는 화물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친다  내 밥그릇만 챙기며 침묵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들의 노예가 될 거라고

거북이

거북이 / 이재봉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으렴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사람이 춤을 추며 거북이를 유혹하자 거북이는 할 수 없이 황금알을 내준다 그 후 그는 무슨 일만 터지면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을 외우고 다닌다 오직 주술만이 나라를 구하고 더없이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며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엉겁결에 황금알을 내준 거북이는피식 콧물을 내뿜으며엉금엉금 바닷가로 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