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시인의 말

외로움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jaybelee 2023. 3. 21. 03:21

“열다섯 살 때, 봄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답니다.”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이상은(李商隱)이 쓴  <무제(無題)>라는 시로 4월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까닭 없이 슬프기만 했던 그 시기에 나에게 봄이 슬프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시였다.

 

부끄러움이 시를 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면 외로움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해 4월 초, 봄 소풍 때의 일이었다. 소풍 나온 친구들이 잔디밭에 빙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노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목련꽃그늘에 앉아 떨어진 꽃잎을 줍고 있었다.

 

그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인이었던 담임선생님이었다. “이재봉! 시 한 번 써볼래?” 그 후 선생님은 자신의 첫 시집인 <어느 문 밖에서>를 주시면서 문예반에 들어와 시를 배우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외로움에 젖어있던 사춘기 청년에서 시를 쓰는 문학청년으로 변해갔다.

 

나는 문학이 외로움을 해결해 줄 거라 믿고 밤을 새우며 시집을 읽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나의 이 생각도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다시 외로움에 빠져있었다. 목련꽃그늘에 앉아 떨어진 꽃잎을 줍고 있던 사춘기 그 시절처럼.

 

몇 해 전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을 둘러 본 적이 있다. 수천의 병사들을 양 옆에 세워놓고 누워있는 진시황의 무덤을 보았다. 외로움이 무서워 죽어서도 수천의 병사들을 곁에 두고도 모자라 광대와 악사들 까지 불러들인 그의 무덤을 보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아무도 진시황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도대체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왜 함께 있는데도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진시황은 죽어서도 깨닫지 못했다. 둘이 있어도 외롭고 셋이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 외로움은 생명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러기 떼가 끼룩거리며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 자세히 바라보니 별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를 끌어당기며 날아간다. 지구 속의 기러기, 우주 속의 별, 저들 사이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존재한다. 이쪽에서 움찔하면 저쪽에서 찔끔한다.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암흑물질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이러한 팽창을 막아준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암흑물질은 별을 꿈꾸다 별이 되지 못한 외로운 입자들이다. 우리는 외롭기 때문에 서로를 끌어당긴다. 우주가 팽창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그러면 더 세게 서로를 끌어당기게 된다.

 

외로움이 없는 사람은 결코 먼 길을 갈 수 없다. 마치 기러기와 별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먼 길을 가듯이. 나는 그 외로움의 힘으로 시를 쓰고 있다. 우주는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변해왔으며 우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먹고사는 것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는 늘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위대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시가 먹고 사는 것과는 무관하지만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생명체에 눈을 돌리고, 유한한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시간을 무한한 순환의 수레바퀴로 돌려놓는 작업이 곧 시가 추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복잡 다기(複雜多岐)하다.

 

2023년 여름 끝 무렵

이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