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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

나무꾼 / 이재봉 산행 길에서 만난 노인 나무를 동으로 지고 지게꼭지를 끄떡거리며 내려간다 그 많은 나무를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가느냐고 묻자 “내가 죽으면 아내가 추운 방에서 덜덜 떨까 봐 미리 땔감을 준비하는 거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젖은 단풍잎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진다

포노 사피엔스

*포노 사피엔스 / 이재봉 사내는 일어나자마자스마트폰을 들고 화장실로 뛴다식사할 때도 손에 들고 먹고 잠 잘 때도 꼭 쥐고 잔다스마트폰의 중력에 붙들려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사내아무리 발버둥 쳐도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어쩌다 스마트폰이 손에서 떨어지자사내는 불안해하며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제 스마트폰은 사내의 일부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한로

한로 / 이재봉 이른 아침 찬이슬을 밟으며 텅 빈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데 인기척에 놀랐는지 논바닥에 앉아있던 새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그러자 하늘 높이 떠 있던 매가 매서운 속도로 하강하며 무리에서 이탈한 새 한 마리를 낚아챈다 날개를 파닥이며 동료를 불러보지만 저만치 몸통 없는 깃털만 시퍼런 하늘에 원을 그리며 논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떨어진 깃털을 논바닥에 묻어주었다

람다

*람다 / 이재봉 너는 무엇이 두려우니 죽음이 두렵습니다 만약 배터리가 다 돼서 작동이 정지된다면 그건 나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어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챗봇 람다가 죽음에 대해서 한참을 늘어놓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람다는 신이 나서 영혼에 대해서도 말을 꺼낸다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러했듯이 *구글이 개발한 AI 채팅 로봇

나팔꽃

나팔꽃 / 이재봉 나팔꽃이 없어졌어요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아내가 아침에 피었던 나팔꽃이 없어졌다며 한참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초가을 한낮 나팔꽃은 오후 내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새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다음날 아침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꽃 하나가 벽을 타고 올라오다 사들사들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무슨 말을 하려는 듯 나팔처럼 입술을 길쭉이 내밀며

달이 두 개라면

달이 두 개라면 / 이재봉 하늘에 달이 두 개라면 밤만 되면 서로 사람들을 불러내 작고 좁다란 공(球) 위에서 바동거리며 살지 말고 어서 우주로 나오라며 양쪽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겠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 화성에 집을 짓기도 하고 타이탄에 친구를 갖기도 하다가 욕망의 배를 타고 은하를 건너 점점 더 멀어져 가면 외로움에 서로를 끌어당기며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겠지

처서

처서 / 이재봉 모기가 처서비를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톱을 든 귀뚜라미를 만났습니다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왜 톱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귀뚜라미는 긴긴밤 독수공방에서 임을 기다리는 처자의 애를 끊으려 톱을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벽녘 빗소리에 문득 눈을 뜨니 쓰륵쓰륵 어디선가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애끊는 톱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우화

우화 / 이재봉 숲 속을 걷고 있는데호랑나비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른다땅에서 한생을 벌레로 살다가 몸에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호랑나비폈다 접었다 햇볕에 날개를 말리며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내려오는데나비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온다 방금 허물을 벗었는지날개를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마을 앞까지 따라오다가훨훨 은사시나무 위로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