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시집 [익명의 시선]/시인의 말

익명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jaybelee 2024. 7. 7. 00:07

봄비 내리던 날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파란 줄무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줄에 오종종 앉아 있다. 끈이 풀린 신발을 신고 있던 한 학생이 비스듬히 앉아 옆 친구의 핸드폰을 훔쳐보면서 낄낄거린다,

 

다음 역에서 여학생 서넛이 올라타자 뒤꿈치를 구부려 신고 있던 학생이 두두룩한 여학생의 엉덩이를 곁눈으로 훔쳐본다, 지하철이 철교를 지나며 흔들거리자 신발 하나가 해진 앞꿈치 사이로 하얗게 웃고 있다. 순간 신발 속에 감춰졌던 내 모습이 희끗희끗 지나간다.

 

벨기에의 저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신발인지 맨발인지 알 수 없는 붉은 모델(Le Modèle Rouge)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왜 맨발의 모양을 하고 있는 기이한 신발을 그렸을까? 그 신발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는 신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신발 속에 숨겨 놓은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고 좌절 속에서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 홉스는 인간의 행동은 자기쾌락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했다. 욕망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자유로운 운동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익명이라는 장막에 욕망을 감추고 산다. 욕망은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주도하며, 우리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거나 특정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동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시 쓰기 또한 욕망의 확장이다.

 

시는 의식화 된 눈이 아닌 무의식의 눈, 즉 익명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유연상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창고에 감춰져 있던 감정이나 욕망을 꺼내 은유하고 상징하는 것이 시이다.

 

2024년 봄

이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