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별 푸른 별 / 이재봉 푸른 별 하나가눈 속으로 떨어져, 문득 사라진다 별은 이렇게 우리 눈에 닿아 존재라도 알리지만 인간은 별에게 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다 매일 밤 별을 바라보지만까맣게 마음만 타들어갈 뿐 그리운 마음 보낼 길이 없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2021.08.31
쇠라의 그림 속에는 쇠라의 그림 속에는 / 이재봉 우주의 어느 일요일 쇠라가 푸른 공(球)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늘에 점을 하나둘 찍어나가자 점점 모이면서 은하가 하늘 한 가운데를 흐르고 백조가 그 위를 날고 있다 강가에선 직녀가 칠석날을 기다리며 비단을 짜고 있고 은하 언저리에선 창백한 푸른 점이 반짝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고뇌하는 예술가와 과학자들 썩은 정치인과 타락한 지식인들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한 점에서 살고 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2021.08.11
랜선 여행 랜선 여행 / 이재봉 뚫린 열쇠구멍으로 남자의 방을 들여다본다 남자는 모니터 앞에 앉아 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러 암리차르로 떠난다 불멸의 연못에서 시크교도 세 명이 몸을 씻고 있다 남자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신발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 몸을 씻는다 흰 터번을 두른 무슬림도 옆에 앉아 몸을 씻다가 줄무늬 티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넌다 불멸의 연못을 마우스로 건드리자 모니터 한가운데서 황금사원이 출렁인다 대리석 통로를 통하여 연못 밖으로 나가자 네 개의 문이 보인다 브라만도 바이샤도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문 남자는 서쪽 문으로 걸어 나와 이미지를 저장한 다음 모니터를 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1.07.07
고봉밥 고봉밥 / 이재봉 육남매가 두레상에 둘러앉아 밥 한 그릇을 단숨에 해치운다 학교에 얼른 가야 하는 아이들 밀어 넣는 밥숟갈이 너무 크다 천천히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항상 넘치는 어머니의 고봉밥 어머니에게 고봉밥은 사랑이다 사랑은 넘쳐야 사랑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6.23
다중우주 다중우주 / 이재봉 아현동을 지나가다 봤다 언덕 위에 판잣집이 고층아파트로 바뀌고 시장골목이 빌딩숲으로 바뀐 것을 옛 철학관이 있던 자리에 전봇대가 서있고 참새들이 줄지어 전깃줄에 앉아 있는 것을 아현동 고개를 넘다가 봤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 임으로 사건을 멈춰 세운 것일 뿐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사건의 연속이며 사건은 시간의 줄 위에 늘어서있다 참새들이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는 것처럼 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2021.06.17
감꽃 감꽃 / 이재봉 바람이 살랑하여 마당에 나갔더니 감나무에 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개굴개굴개굴 앞 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감꽃은 떨어지고 별만 반짝인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2021.06.07
마술 마술 / 이재봉 재래시장에서 만난 마술사 뜨거운 불꽃을 들이마시자 볼록 튀어나온 두 볼에서 장미꽃이 튀어 나온다 이번에는 검은 상자에 입김을 불어넣자 비둘기가 나와 높이 날아간다 화구(火口)에 불을 붙이자 재가 되어 사라지는 아버지 평생 차갑게 사시다가 뜨거운 열과 빛이 되어 내 주위를 서성인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푸른 별 2021.06.01
창가에서 창가에서 / 이재봉 주여,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과 향기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들을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새떼들을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만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 하늘로 사라지고 하늘에는 금빛 노을이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주여,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는 당신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5.01
휴지통 휴지통 / 이재봉 문서를 작성하다가 파일을 날려 보냈다 파일을 복원하려고 휴지통을 열자 수백 개의 폴더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하나하나 폴더를 검색하다 너무 엄청나서 그만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 머릿속도 컴퓨터의 휴지통을 닮았다 추억에 갇혀 버리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이 밤만 되면 나타나 잠을 못 이루게 한다 파란 대문으로 여자 아이가 걸어 나오고 꽃이 가득한 치마를 입고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꼿꼿한 할아버지가 장대를 들고 걸어 나온다 기억 위에 기억을 쌓다보면 어느새 생각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다 기억을 비우지 못한 내 마음은 항상 복잡하고 산란하다 기억을 흘려보내야 또 다른 기억이 쌓이듯 휴지통은 비어있어야 휴지통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랜선 여행 2021.04.21
풀 한 포기도 풀 한 포기도 / 이재봉 땅 속에 묻혀 있는 민들레가 차가운 벽을 뚫고 다시 나오도록 하나님은 온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한낱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도 이처럼 거듭나게 하시는데 당신의 모습대로 빚은 사람이 땅 속에서 썩도록 내버려두시겠는가 우리를 그냥 놔두시겠는가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마른가지에서 꽃이 다시 피어나듯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 나게 하신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