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 78

나무꾼

나무꾼 / 이재봉 산행 길에서 만난 노인 나무를 동으로 지고 지게꼭지를 끄떡거리며 내려간다 그 많은 나무를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가느냐고 묻자 “내가 죽으면 아내가 추운 방에서 덜덜 떨까 봐 미리 땔감을 준비하는 거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젖은 단풍잎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진다

한로

한로 / 이재봉 이른 아침 찬이슬을 밟으며 텅 빈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데 인기척에 놀랐는지 논바닥에 앉아있던 새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그러자 하늘 높이 떠 있던 매가 매서운 속도로 하강하며 무리에서 이탈한 새 한 마리를 낚아챈다 날개를 파닥이며 동료를 불러보지만 저만치 몸통 없는 깃털만 시퍼런 하늘에 원을 그리며 논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떨어진 깃털을 논바닥에 묻어주었다

람다

*람다 / 이재봉 너는 무엇이 두려우니 죽음이 두렵습니다 만약 배터리가 다 돼서 작동이 정지된다면 그건 나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어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챗봇 람다가 죽음에 대해서 한참을 늘어놓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람다는 신이 나서 영혼에 대해서도 말을 꺼낸다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러했듯이 *구글이 개발한 AI 채팅 로봇

달이 두 개라면

달이 두 개라면 / 이재봉 하늘에 달이 두 개라면 밤만 되면 서로 사람들을 불러내 작고 좁다란 공(球) 위에서 바동거리며 살지 말고 어서 우주로 나오라며 양쪽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겠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 화성에 집을 짓기도 하고 타이탄에 친구를 갖기도 하다가 욕망의 배를 타고 은하를 건너 점점 더 멀어져 가면 외로움에 서로를 끌어당기며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겠지

처서

처서 / 이재봉 모기가 처서비를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톱을 든 귀뚜라미를 만났습니다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왜 톱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귀뚜라미는 긴긴밤 독수공방에서 임을 기다리는 처자의 애를 끊으려 톱을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벽녘 빗소리에 문득 눈을 뜨니 쓰륵쓰륵 어디선가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애끊는 톱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소나기

소나기 / 이재봉 하교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뛰어가는데 뒤에서 이웃집 누나가 뛰어왔다 모자를 벗어 그녀에게 씌워 주고 빗길을 같이 뛰었다 발보다 먼저 가슴이 뛰었다 먹구름이 몰려가고 퍼붓던 빗줄기가 잠잠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갔다 나는 멍하니 길가에 앉아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에덴농원

에덴농원 / 이재봉 누런 보리밭 길을 걸어가는데 ‘에덴농원’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길을 가는 농부에게 에덴농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여기라며 보리밭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아담의 자손들이 묻힌 그곳에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스며들어 에덴의 땅이 된 것일까 생명수가 넘실대는 에덴농원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데 누런 물결은 금빛 노을이 되어 서쪽 하늘에 떠있고 농원은 다시 어두운 무덤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