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지구의 아침] 78

들꽃

들꽃 / 이재봉 누가 내다 버린 들꽃을 꽃밭에 옮겨 심었는데 동이 트자마자 벌들이 윙윙거리며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들꽃이 노란 꽃잎을 활짝 열고 벌레들에게 식사 보시를 하고 있다 스스로 향기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온갖 벌레들이 찾아와 꿀을 빨고 있다 물을 주려고 꽃밭에 다시 가보니 몸을 다 내준 들꽃이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누릇누릇 풋거름을 만들고 있다 살신성인하는 들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은은한 향기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고 있다

외로움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열다섯 살 때, 봄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답니다.”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이상은(李商隱)이 쓴 라는 시로 4월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까닭 없이 슬프기만 했던 그 시기에 나에게 봄이 슬프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시였다. 부끄러움이 시를 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면 외로움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해 4월 초, 봄 소풍 때의 일이었다. 소풍 나온 친구들이 잔디밭에 빙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노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목련꽃그늘에 앉아 떨어진 꽃잎을 줍고 있었다. 그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슈퍼문

슈퍼문 / 이재봉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의미부여 하는 걸 좋아합니다 똑같은 달인데도 작게 보이면 마이크로문이고 크게 보이면 슈퍼문이고 붉게 보이면 불러드문이고 한 달에 두 번 뜨면 블루문이라고 합니다 현란한 말에 속지 마세요 언어는 은유이고 환유일 뿐입니다 슈퍼문도 블루문도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머릿속에 떠 있습니다

밥풀

밥풀 / 이재봉 아내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내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며 슬그머니 밥풀을 떼어낸다 나는 내 얼굴인데도 스스로 볼 수 없는데 아내의 얼굴은 속속들이 다 보인다 두 볼에 부얼부얼 일어난 솜털도 까만 풀씨가 날아와 콧등에 박힌 것도 머릿속에 가려진 티끌까지도 다 보이는데 정작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내 얼굴인데도 상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나는 내 안에 있지 않고 상대의 눈 속에 있다

섣달그믐

섣달그믐 / 이재봉 컴퓨터를 초기 상태로 되돌리려 단축키를 누르고 다시 시작하듯 묵은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한다 묵은 기억은 삭제되고 모든 설정이 초기화되었다며 제야의 종소리 사이로 알림창이 뜬다 하늘에선 하얀 눈이 아픈 기억들이 지워진 자리에 탐스럽게 쏟아진다 환하게 등불을 밝혀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화목제로 오신 예수

화목제로 오신 예수 / 이재봉 예수님은 그냥 오시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죄인 대신 속죄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 곁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어린양이 되시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화목제로 오셨다

도시에 오는 눈

도시에 오는 눈 / 이재봉 가지 끝에 거뭇거뭇 까막새 날아와 울고 가더니 도시에 눈이 내린다 잿빛 눈은 내리자마자 시커먼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손 시린 줄 모르고 친구들과 고샅길을 싸다니며 눈을 뒤집어쓰고 놀던 하얀 눈은 어디로 갔을까 닿을 듯 말 듯 눈송이에게 다가가는 순간 차가운 시멘트벽이 나타나 추억을 가로막고 어쩌다 손등에 떨어진 눈송이 하나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울고 간다

여행 떠나던 날

여행 떠나던 날 / 이재봉 아침부터 짐을 꾸렸다 기내에서 읽을 시집 몇 권과 새로 나온 소설책을 가방에 넣고 있는데 아내가 그곳은 추운 곳이라며 두꺼운 외투와 스웨터 두 벌을 간동간동 쌌다 그러면서 입맛이 없을 때 잘 챙겨 먹으라며 볶은고추장과 컵라면을 자잘한 짐 사이로 쑤셔 넣었다 정오가 될 때까지 짐 꾸리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가방의 지퍼가 터져 그 안에 있던 짐이 다 쏟아지고 나서야 짐 꾸리기는 멈춰 섰다 나는 가방을 버린 채 빈 몸으로 집을 나섰다 몇 개의 기억만 가슴에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