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시인의 말

부끄러움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jaybelee 2016. 5. 31. 17:07

어린 시절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러다보니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했다.

 

부끄러움은 또한 나를 조신하게 만들었다. 원래의 내가 아닌 근사한 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나의 행동을 억누르고 조숙하게 처신했다. 부끄러움이 그렇게 나의 성장을 방해했던(?) 시기에 나는 시(詩)라는 도피처를 찾았다.

 

내 시에는 과거에 관련된 이미지가 많다. 초등학생 시절 옆집 할아버지에게 쫓겨 몸을 숨겼던 느티나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다가 과거로 빨려 들어간 웜 홀,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옛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던 KTX 등. 나는 과거를 예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속에 억압되고 억눌려 있던 나의 존재성을 복원하고 싶었다.

 

왜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할까? 과거를 긍정함으로써 나의 현재를 방어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불분명한 미래보다는 분명했던 과거가 훨씬 낫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내 시작(詩作)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사물(事物)과 사상(事象)들이다. 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숨 막히고 억눌렸던 그 시대에 대한 미학적(美學的) 부정을 시도한다. 내가 시도한 미학적 부정의 대상은 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민주주의의 시인, 미국의 국민시인 등의 화려한 수사가 붙어 다니는 휘트먼(Walt Whitman)은 시인의 길로 들어선 36세부터 일생 동안 첫 시집 『풀잎』을 끊임없이 수정, 증보해 임종판까지 9판을 출간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휘트먼은 한 번도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고치고 고쳤다.

 

나 또한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 시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 단지 도덕적 감수성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의 발로였다.

 

부끄러움이란 이렇듯 사실과 자아(ego)의 충돌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부끄러움이 생기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부끄러움에서 나온다. 비록 시가 세상의 권력 앞에서 무력해 보일지라도 자족(自足)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직도 나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며 시를 쓰고 있다.

 

세 번째 시집이다. 의식의 이분법(二分法)을 시적 사유로 삼은 첫 번째 시집 『사랑이 있는 풍경』과,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시적 공간을 그려낸 두 번째 시집 『시간 여행』에 이어, 세 번째 시집에서는 부끄러움을 미학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내 시의 평자(評者)가 되어주신 양수창 시인님, 그리고 선친에 이어 2대 째 시집을 출간해 주신 김규화 시문학사 발행인님에게 감사드린다.

 

 

2016년 봄

이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