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시간여행]/작품 해설

부끄러움의 미학과 시적 승화를 통한 두 개의 공간 / 양수창 시인

jaybelee 2010. 5. 27. 11:17

이재봉 시인은 필자에게 다정한 이웃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재봉 시인과 남단의 진해에 사는 필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둘은 언제나 가까운 이웃이요, 늘 정이 오가는 이웃이며, 사이좋은 이웃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시인나라]에서 약 7년 전에 만났는데 그동안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직접 만나 지금까지 시에 대하여 교감하면서 절친하게 지내오고 있다.

 

이재봉시인은 매우 겸손한 시인이다. 그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언어를 절제하면서 서정의 세계를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시킬 수 있는 시를 창작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만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돌아볼 줄 알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는 아버지 고 이정호 시인에 이어 2대째 시를 쓰고 있으며 문단에서 영향력 있는 시인들과도 교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신의 시와 문단에 대해 자신감과 우월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봉시인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하면서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자신의 시에 대하여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반성하면서 통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쓴 시는 믿을만하고 기쁘게 추천할만하다.

 

이번 시집을 내면서도 그는 "부끄럽습니다."라는 말을 필자에게 여러 번 하였다. 이번에 시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이재봉 시인이 이미 첫 시집을 출판하였던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시집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부끄럽다고 거듭 사양하는 것을 발문을 쓰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득하여 첫 시집을 전달받게 되었다. 1993년 10월에 화동출판사에서 펴낸 이재봉 시집 [사랑이 있는 풍경]을 읽다가 어디서 본 듯한 시를 여러 편 대하게 되었다. 이재봉 시인이 필자에게 발문을 써달라고 정리해서 보여준 시들과 같은 제목이거나 같은 내용의 시가 일부 중복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이재봉 시인이 다시 수정 보완하여 퇴고한 시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이재봉시인의 겸손함과 부끄러움의 미학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1. 부끄러움에서 얻은 미학

 

혹자들은 어떻게 부끄러움이 아름다움이 되겠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서문(序文)격인 시작노트에서 "쓸수록 시는 어렵고, 쓰고 나면 부끄럽다."라고 고백하였다. 이는 그냥 지나가는 식의 겉치레 인사 정도의 글이 아닐 것이다. 그의 시 「꽃」을 보면 어려서부터 부끄러움 잘 타는 소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머리가 긴 담임선생님이 맞은편

에서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치마 속에는 꽃이 가득했습니다.

-「꽃」 전반부

 

어머니와 외갓집에 가다가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보통 아이들 같으면 반가워서 "선생님~"하고 부르면서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움 잘 타는 어린 소년 이재봉 시인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그만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 숨어버리고 만다. 이렇듯 그는 본성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본성을 성인이 된 그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그의 시를 살펴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첫 시집을 문단에 상재하고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10여 년간 그는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부끄러움 때문에 쓰지 못한 것 같다. 마치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긴 것처럼 그는 문단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무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숨기고 지내왔다. 그러던 그가 용기를 내어 다시 필을 들었고 그것은 이전에 첫 시집에 발표했던 시들 가운데 화자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에 미진하게 여겨지는 시들에 용감하게 메스를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시가 소년 시절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던 시 [꽃]이다.

 

정지된 시골길을 어머니와 함께 걸었다 얇은 안개를뚫고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던 머리가 긴 여선생이 지나갔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치마 속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첫시집「사랑이 있는 풍경」중『어머니』전문

 

담임이었던 여선생님을 만나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숨었다가, 화자는 시선을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 돌리며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여기까지가 당시 그가 쓴 시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담임이었던 여교사가 아니라, 미처 시적 승화를 시키지 못하고 저자의 마음에 미흡하게 생각되는 수준에 머물렀던 시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첫 시집에 수록하였던 시를 다시 퇴고하기에 이른다. 어머니 치마 속에서 꽃처럼 아름다웠다는 감성적 느낌에서 멈추었던 시를, 그는 더 나가 어머니 치마 속에서 꽃 한 아름을 안고 나오는 것으로 구체화시킴으로 시적 승화를 이루어 한 단계 더욱 완성된 시를 얻으면서 부끄러움은 시적 형상화와 시의 완성도에서 아름다운 서정의 옷을 입히고 독자에게 큰 기쁨을 나누기에 충분한 시를 재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 외에도 두 번째 시집의 타이틀이 된 [시간 여행]은 첫 시집에 [할아버지]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시를 재창작하여 수록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첫 시집에 수록했던 시 가운데 두 번째 시집에 다시 수록한 시편들은 재수록이 아니라 재창작에 의해 다시 얻어진 시를 수록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골짜기 은수원 나무숲 사이로 살구나무가 보였다 살구가 먹고 싶었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몰래 살구를 땄다 할아버지가 긴 작대기를 들고쫓아 온다 황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도망갔다 시계를보니 금요일 오후 두 시다 세 시에 호텔 커피숍에서만나기로 한 로제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는 힘을다해 뛰었지만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몸이 종이처럼가벼워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첫시집「사랑이 있는 풍경」중『할아버지』전문

 

첫 시집에서 화자가 시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부분들을 미처 승화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간직했던 부분들에 대해 시인은 부끄러워할 줄 알았고,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용기를 내어 다시 퇴고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은 완성도 높은 시를 얻기에 이르게 된다.

 

골짜기 은수원나무숲 사이로 살구나무가 보였다 나무 위에 올라가 몰래 살구를 따고 있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긴 작대기를 들고 쫓아왔다 황급히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골짜기 위로 눈이 없는 새떼들이 우르르 은사시나무숲을 흔들며 시간을 거슬러 날아갔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다 두 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한 로제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새떼들의 뒤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날아갔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하얀 호텔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여행] 전문

 

제목부터 [할아버지]에서 [시간여행]으로 바꾸었고 내용에서도 시를 대하는 자세와 시선이 완연하게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제거하였고, 할아버지가 쫓아오자 나무에서 황급히 내려와 달아났던 것과는 달리 황급히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의 시는 부끄러움 때문에 꾸준히 성장하고 더욱 발전하여 완성도 높고 작품성 있는 시의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첫 시집을 문단에 상재하고 친지들로부터 시인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시에 대하여 미진한 부분을 살펴보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았기에 더욱 수준 높은 시를 써서 독자에게 심미적인 시적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여, 필자는 그가 부끄러움 때문에 얻은 미학(美學)이라 부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2. 시적 승화와 두 개의 공간

 

전봉건 시인은 1968년 ‘문명사’에서 에세이집 [詩를 찾아서]를 발행하였는데 [두 개의 현실(現實)과 두 개의 정말]에 대하여 쓰고 있다. 두 개의 현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고 또 하나는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필자는 이 현실을 나름대로 공간이라고 불러 본다.

 

시인은 현실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사실을 시 창작이라는 과정을 거쳐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 시로 승화 시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화자의 마음속에 내재한 현실, 마음속에 내재한 공간을 시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전봉건 시인의 에세이 [시를 찾아서]를 읽은 지 수 십년이 되어 기억에 또렷하지는 않지만 “시는 가공의 현실”이라고 전봉건 시인이 나름대로 정의했던 것에 공감하고, 그동안 시를 쓰면서 가공의 현실 즉 가공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말, 진실을 시로 나타내려고 노력하였었다.

 

그런데 이재봉 시인의 시를 살펴보면 두 개의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현실의 공간이고 또 하나는 시적 승화를 거친 또 다른 공간, 즉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시적(詩的) 공간이다. 이런 시를 만난다는 것은 필자에게 큰 기쁨이다. 아마 독자들도 이런 시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재래시장 입구

도로 한 복판

 

멀리 노점상단속반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자

수북이 쌓인 감자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기우는 햇살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체온보다 따스한 저 손길

금방이라도 노란 싹이 돋아날 것만 같다.

-「감자」 전문

 

그의 시 「감자」를 보면 재래시장 도로 한 복판이 보인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1연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2연에서 멀리 노점단속반원이 등장하고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온다. 그러자 좌판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던 감자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는 결코 단속반원의 등장에 허둥대는 노점상을 말하지도 않고 단속반원이 와서 좌판을 넘어뜨리는 광경도 그리지 않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감자더미를 언급함으로써 독자들이 얼마든지 상황을 연상할 수 있도록 그림 그리듯이 절제된 언어로 현실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1연과 2연은 우리가 길을 지나가다가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현실 그대로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너절하게 상황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삽입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시의 장점이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그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3연과 4연에서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 즉 시적(詩的) 공간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비쳐진 또 다른 현실을 그려낸다. 우리가 실존하는 현실은 비정하고 인정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지만 화자가 바라보는 현실 너머의 또 다른 공간에는 따스한 정이 있고 사랑이 있다. “기우는 햇살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화자가 발견한 공간에서는 기우는 햇살이 등장한다. 햇살 자신도 저녁 시간에 기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무너지는 감자더미에 따스한 손을 뻗어 데굴데굴 힘없이 굴러가는 감자의 손을 붙들어 준다. 화자는 4연 1행에서 “체온보다 따스한 저 손길”이라고 온정이 넘치는 손길을 부각시킨다. “금방이라도 노란 싹이 돋아날 것만 같다”고 한 것처럼, 그가 그려내는 공간에는 온정의 손길이 있어서 살맛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노란 새싹이 돋아나 무럭무럭 자랄 것 같은 공감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재봉 시인의 시를 살펴보면 이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시적 승화과정을 거쳐 시적 공간으로 들어가 화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공간의 시적 세계를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친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휘리릭 지나간다.

돌멩이를 던지자 지붕 위로 달아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고양이가

달 속에 숨어서

달려들 듯 차갑게 나를 노려본다.

-「보름밤」 전문

 

총 8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인데 1행에서 4행까지는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대로 간결하게 그려나간다. 친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침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니까 고양이를 향해 장난삼아 돌을 던진다. 고양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까? 재빨리 지붕 위로 달아난다. 여기까지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재봉 시인은 여기에서 시선이 머물지 않고,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을 바라본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독자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그곳에는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고양이가 있다. 장난하는 마음으로 던진 돌덩이에 고양이는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고양이는 달 속에 숨어서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복수하기 위해 달려들 듯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봉 시인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 같은 곳에서 이면에 가려진 아픔과 고통을 감정을 삽입하지 않고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 몇 마디로 시적 승화의 단계를 거쳐 또 다른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 깊은 생각과 각성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 대부분 이렇게 현실의 공간에서 시작하여 시적 또 다른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고 들어가 화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결코 강요하지 않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창작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늠하게 한다.

 

마곡사 뒤뜰

연화당에 앉아

꽃차를 마시는데

꽃잎 하나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다 그만

태화산 중턱에 걸려

활활 타오른다.

 

물을 긷던 사미니

우두커니

불타는 산을 바라보다

속이 타는지

물만 들이켠다.

-「영산홍」 전문

 

2연으로 이루어진 시로 풍경을 스케치하듯 총 11행으로 쓴 짧은 시인데, 1연 1행에서 3행을 보면 현실의 세계에서 화자는 마곡사 뛰 뜰 연화당에서 꽃차를 마신다. 흔히 꽃차를 마시면 꽃차의 향기가 감미롭다는 등의 주관적인 느낌을 말하기 쉬운데. 그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흔히 느끼는 감상문을 쓰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꽃차를 마시는데 꽃잎 하나가 목구멍에 걸리는 것 역시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화자는 꽃잎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다가 태화산 중턱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태화산 중턱에는 영산홍이 빨갛게 피어 마치 활활 타고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시인은 태화산 중턱에 영산홍이 군락을 이루어 활활 타는 것 같다는 서술이 없이 훌륭하게 태화산 중턱에 불길이 활활 타는 것처럼 빨갛게 피어있는 영산홍을 단 몇 마디 시어를 통해 형상화 시키고 있다. 화자는 이렇게 시적 공간에서 가능한 시적 승화를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꽃잎이 태화산 중턱에 걸려 활활 타오른다’는 시적인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었다가. 2연에서는 다시 현실 공간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재봉 시인은 시적 공간과 현실 공간, 두 개의 공간을 어쩌면 능수능란하게 오가면서 시를 통해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두 개의 공간을 넘나드는 사람이다. 현실공간에만 머무는 시인은 현실너머의 또 다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시적인 세계의 신비롭고 아름다움에 대하여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재봉 시인은 시적 승화의 과정을 통해 두 개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따스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넘치는 공간, 미학이 충만한 공간, 자신만의 또 다른 공간을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시적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사랑법

 

이렇게 두 개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독자들에게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여행이라는 시집 타이들과 더불어 봄여행, 여름여행, 가을여행, 겨울여행 등 4부로 작품의 소재에 따라 시간 여행을 구분하였지만 필자는 계절 구분에 상관없이 그의 시집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을 살펴보고 여기서 고찰하려고 한다.

 

시집을 대표하는 타이틀 시가 된 「시간여행」에 보면 “골짜기 위로 눈이 없는 새떼들이 우르르 은사시나무숲을 흔들며 시간을 거슬러 날아갔다”고 했다. 그의 시간여행은 미래를 향한 여행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회귀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 시적 공간에서 화자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면서 과거가 현실이 되기도 하고 그것이 과거 속의 현실로 드러난다. 그의 시간여행에서는 먼저 가족들의 사랑과 헌신을 만나게 된다.

 

성묘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누가 내 뒤를

따라온다.

 

돌아보니

하얀 낮달이 나를

내려다본다.

 

아버지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눈을 감지 못하고

산등성이까지 내려와

길을 밝혀주신다.

-「낮달」 전문

 

저물녘

논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서 본 듯한 별 하나가

도랑 속에서 반짝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밝혀준다.

-「북극성」 전문

 

이재봉 시인의 시 가운데 아버지가 여러 번 등장한다. 화자의 부친은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낮달이 되어 산등성이까지 내려와 길을 밝혀주고 때론 밤길을 걷는데 북극성이 되어 등불을 들고 와 어둔 밤길을 밝혀 준다. 이처럼 아버지는 이재봉 시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시는 분이었다. 그가 살아가는데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하시는 분이 아버지의 존재였는데, 이미 고인이 되신 부친을 시간 여행을 통해 시 가운데서 만나고, 지금도 아버지의 보살핌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을 시적 승화를 통해 자상하고 친근한 부성애(父性愛)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아파트 뒷산을 오르는데 길가 풀숲에서

어머니 냄새가 난다. 가만히 덤불 속을 헤치자 노란

호박꽃이 단내를 풍기며 벌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언제 곱게 화장했던 적이 있었을까. 평생 단내를 달

고 사신 어머니.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느라 시름시

름 잎이 지고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저 호박꽃.

-「호박꽃」 전문

 

그의 시간여행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평생 단내를 달고 사신 어머니,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고 영양분과 사랑을 공급하며 사느라 자신은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모성애를 호박꽃을 통해 극명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런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행위는 「어머니의 손」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먼지버섯 한 그루, 참죽나무 밑에서 온몸을 오므렸다 폈다

를 반복한다. 홀씨를 뿜어내느라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

나가고 빈 거죽만 남았는데도 흐린 날이면 습관처럼 홀씨

가 잘 날아가도록 쪼글쪼글한 몸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관

절염 신경통에 두 손을 제대로 못 쓰는 어머니, 오늘처럼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이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신다며

끙끙 앓다가도 손자 녀석이 배가 아프다며 칭얼거리자 검

버섯이 수두룩한 손을 펴 손자의 배를 슬슬 쓸어 주신다.

-「어머니의 손」 전문

 

연로하신 어머님은 관절염 신경통으로 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신다. 그럼에도 손자 녀석이 배 아프다고 칭얼거리자 검버섯이 수두룩한 손을 펴 손자의 배를 슬슬 쓸어주시는 행위를 참죽나무 밑에서 온몸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하는 먼지버섯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마지막 남은 사랑을 온 힘을 다해 가족을 위해 끝까지 쏟아내시는 어머님의 희생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꽃」을 다시 살펴보면 어머님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있었습니다. 그때 머리가 긴 담임선생님이 맞은편 에서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치마 속에는 꽃이 가득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선생님이 지나가자 꽃을 한

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앞산에 꽃이 가득했습니다.

-「꽃」 전문

 

부끄러움을 느낀 어린 소년 이재봉 시인이 급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어머니의 치마 속이었다. 어머니도 여인이다. 여인에게 치마 속은 은밀한 곳이며, 비밀스러운 곳이요,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타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기꺼이 자신의 부끄러움은 생각하지 않고 치마 속을 아들이 숨을 장소로 허용하신다. 당시에는 몰랐을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사랑의 보호막은 진정 성스럽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런 사랑을 아름다운 꽃으로 형상화 시켰고 사랑의 아름다운 꽃을 어머니 치마 속에서 한 아름 안고 나왔다고 고백한다. 어머님의 이런 사랑을 누리며 자란 시인의 눈에는 앞산에 꽃이 가득한 것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시적 공간 안에서 아내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내 아내는

속이 없다.

 

한번은 그녀에게

비상금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며

씩 웃고는

지갑 속에 있는 비상금을

몽땅 털어 준다.

 

내 아내는

이렇게 속이 없다.

-「표주박」 전문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아내를 표주박으로 표현하고 있다. 속을 다 파내고 말린 표주박, 그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갈한 목을 축인다. 아내의 존재란 이런 존재인 것이다. 남편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하는 아내의 사랑을 아름답고 쉬운 문체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해대교에서 만난 물총새 한 쌍, 상처 입은 수컷을

암컷이 등에 업고 바다 위를 날아간다. 화물트럭을

몰던 남편이 병으로 앓아눕자 남편 대신 운전대를

잡은 아내, 주렁주렁 링거를 단 남편을 운전석 뒤에

태우고 오늘도 고속도로를 날아가는 저 물총새 부부.

-「물총새」 전문

 

상처 입은 수컷을 버리지 않고 등에 업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암컷 물총새와 화물트럭에 링거를 단 남편을 운전석 뒤에 눕히고 화물차를 대신 운전하는 아내를 오버랩 시킨 이 시에서 화자는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상처입고 병들어 큰 짐이 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버리지 않고 책임지는 것이 부부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사랑은 점차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발전하여 사회전반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공원 벤치에 노숙자가 누워 있다.

아직도 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알이 게슴츠레 풀려 있고

얼굴은 누렇게 떠 낙엽처럼 푸석거린다.

봄이 왔다고 떠들어대는 개나리꽃의 성화에 겨우 눈을 뜬다.

개나리꽃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어서 일어나라고.

-「개나리꽃」 전문

 

사랑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이 공원벤치에 노숙자가 되어 술에 취해 누워있다. 그는 추운 겨울 동안 이렇게 노숙 생활을 계속 해왔을 것이다. 아직도 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의 노숙 생활은 여전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절망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노숙자의 삶에 희망의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개나리꽃이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반드시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어서 일어나라”고 온정의 손길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기우는 햇살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체온보다 따스한 저 손길

금방이라도 노란 싹이 돋아날 것만 같다.

-「감자」 3-4연

 

앞에서 언급했지만 힘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는 우리의 불우한 이웃이다. 이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뻗어 잡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의 불행을 보고 눈 돌려 피하지 않고, 따스한 손을 내미는 사랑, 사랑과 행복의 싹이 노랗게 돋아날 것이다. 이재봉 시인이 그리는 공간은 이런 사랑이 가득 찬 공간이다. 현실이 암담하더라도 이에 굴하지 말고 서로 잡아주며 용기를 내어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들판을 지나 폐가가 있는 언덕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걸어온다. 나를 이기면 너를 살려주겠다며 도깨비가 덤벼든다. 할아버지는 도깨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쇠말뚝 같은 도깨비의 다리는 꿈쩍도 않는다. 다시 발목을 잡고 오른쪽 어깨로 도깨비를 밀자 쿵 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진다. 구름 속에 숨어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보름달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도깨비는 씨름에서 졌으니 약속대로 너를 살려준다면서 도깨비 방망이로 돈과 보물을 내놓고는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눈부시고 눈부신 밤이다.

-「페어플레이」 3-4연

 

이 세상은 마치 도깨비 같은 세상이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허무한 패배를 당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깨비와의 약속에 신뢰가 가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약속을 근거로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하게 도전하고 도전하면 결국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들의 할아버지는 당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은 없어도 미련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뚝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뚝심을 가지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도전해 보자. 도깨비도 할아버지의 뚝심에 손들고 도리어 도깨비방망이를 주고 사라진다. 무모해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가족과 불우한 우리의 이웃을 위해 도전하고 도전하면 도깨비 방망이 하나 얻게 될 것이다.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고 헌신과 최선을 다하는 뚝심을 갖는다면 살맛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눈부시고 눈부신 밤이다.”

 

이재봉 시인은 현실의 공간을 뛰어넘어 시적 승화의 과정을 거쳐 작품성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새로운 시적 공간을 형성하여 그 안에 살맛나는 세상을 그리고, 감동 주는 사랑법을 가득 가득 채워 놓고 있는 것이다.

 

비 오는 봄날 노래방에 갔네. 4.4조로 내리는 봄비에 맞춰 소월의 진달래꽃을 부르는데 한 여자가 화면 속에서 걸어 나와 탬버린을 흔드네. 경쾌한 7.5조의 율동, 느린 내 노래로는 그 여자의 율동을 따라갈 수 없네. 그 여자가 진달래꽃을 흩뿌리며 화면 속으로 사라지네. 언제나 반 박자 느린 내 사랑법. 머리 위에 꽃비가 또 하염없이 내리네.

-「진달래꽃」 전문

 

그의 시집 『시간여행』 곳곳에서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하여 진솔한 사랑이 넘치고 있다. 이런 사랑은 언제나 반 박자 느리긴 하지만 진한 감동을 준다. 시집 곳곳에 향기 진한 사랑의 꽃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독자들도 함께 이 꽃비에 흠뻑 젖게 되기를 바란다.(양수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