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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 이재봉 배못 고개를 넘어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외할아버지는 대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외갓집 마당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외할아버지는 손수 빚은 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후히 대접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항아리 속에서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술 냄새와 왁자지껄 떠들며 술잔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훈훈한 냄새가 좋았다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날 때까지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옆집 형이 나를 때렸다며 재잘거리면 외할아버지는 내가 가서 혼내주겠다며 두 손으로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외할아버지는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셨다

최근에 쓴 시 2024.09.21

백로

백로 / 이재봉 여름과 겨울 사이제비들이 전깃줄에 모여 앉아풀잎 끝에 맺힌 이슬을 바라본다  더위가 물러가고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 불어오면북쪽으로 떠났던 기러기들이다시 돌아오고전깃줄에는 굴뚝새들이 모여 앉아짹짹거리며 가을을 노래하겠지 전깃줄에 앉아 있던 제비들이가는 여름이 못내 아쉬웠는지날아가는 잠자리를 쫓아마지막 비행을 한다

최근에 쓴 시 2024.09.21

진주 목걸이

진주 목걸이 / 이재봉 결혼 삼십 주년이 되던 날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자목이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조개는 자신의 몸에 모래알이 박히면아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진주층이라는 눈물을 분비한다고 한다 그렇게 눈물이 쌓이고 쌓여 맑고 영롱한 진주가 된단다 평생 모래알을 품고 산 아내고스라니 한 생을조개처럼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왔구나이제는 눈물이 말라 잘금거리는데도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진주처럼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최근에 쓴 시 2024.09.01

따뜻함과 차가움

따뜻함과 차가움 / 이재봉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한 환자가 의사는 따뜻하다고 말하고 나는 차갑다고 말한다간호사의 파란 가운을 보고 어떤 사람은차갑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따뜻하다고 말한다물을 마시며 그녀는 따뜻하다고 말하고 그는차갑다고 말한다창밖에 피어있는 수국을 보고 나비는따뜻하다고 말하고 벌은차갑다고 말한다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같은 말을 하고 있다

최근에 쓴 시 2024.08.21

처연과 농염 사이

처연과 농염 사이 / 이재봉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해 걸어가는데 선방 아래 개울가에서 젊은 여승 하나가 물 위에 떠 있는 부용화를 바라보며 외로이 앉아있다무심코 지나치려는데나이든 여승이 골목 어귀에서 나타나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지나간다연분홍 꽃잎을 드러낸 채물속에 몸을 숨긴 부용화,진한 분홍빛 향기를 내뿜으며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연분홍과 진분홍은 한통속이다한 몸에서 나온 색을다른 그릇에 담았을 뿐이다

최근에 쓴 시 2024.08.11

양귀비

양귀비 / 이재봉 산길을 내려오는데일렁이는 풀숲 사이로 빨간 꽃잎이 하늘거린다 철 이른 코스모스인가 싶어살며시 들여다보니 양귀비가 가는 허리를 흔들며내게로 다가온다 눈이 부셔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그녀의 찬란한 아름다움에옆에 있던 꽃들도 수줍어고개를 숙이며 풀 속으로 숨는다 그녀가 반만 아름다웠더라면현종의 눈이 반만 멀었더라면

최근에 쓴 시 2024.08.01

쓸모

쓸모 / 이재봉 텃밭 고랑에 돋아난 잡초를 뿌리째 뽑아 밭둑에 던지자옆에서 감자를 캐던 이웃이 말한다잡초가 잘 자라는 땅에서 가장 좋은 열매가 열린다고 잡초는 해로운 풀이라 생각했는데이토록 쓸모가 있다니 아내가 이사를 갈 때마다 버리라며 역정을 내던 낡은 앉은뱅이책상골칫거리였던 그 책상 위에화분을 올려놓았더니 집안에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하다

최근에 쓴 시 2024.07.21

재난문자

재난문자 / 이재봉 이른 아침, 호숫가를 걷는데 윙윙거리며 문자가 날아온다 오전부터많은비가내립니다하천의물도빠르게불어나고있습니다하천주변산책로는위험하니가지마십시오  호숫가엔 벌써 빗소리가 성기게 들리고나뭇잎을 타고 미끄러진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오후를지나면서빗줄기가굵어지고있습니다가급적야외활동을피하고대피명령시안전한곳으로피하십시오 저녁에는호우경보가발령될예정입니다퇴근길교통안전에유의하십시오길을걷거나신호를기다릴때는핸드폰을보지마십시오언제어디서차가돌진할지모릅니다 늦은 밤, 비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시 문자가 날아든다 내일도강한비가계속이어질전망입니다여전히살아있는분들이계신다면밖으로나오지않는것이좋겠습니다

최근에 쓴 시 2024.07.17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서 깊은 의미를 찾는 시인

이재봉 시인은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일상적인 상황과 과거의 추억을 잘 조화시키는 데 능숙하다. 일상적인 경험과 과거의 경험을 시적인 경험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중요한 문학적 의의 중 하나이다. 이재봉 시인의 시는 간결하고 명료한 서술이 특징이다. 그는 자연스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다소 직설적인 표현과 과잉된 감정 표현이 때때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자들의 감정에 공감을 일으킨다. 이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독자들은 이재봉 시인의 작품을 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