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나비 흰나비 / 이재봉 나비 한 마리가 돌연 날개를 나울거리며 꽃잎 사이로 날아다닌다 흰나비를 보면 누군가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울 엄마 죽으면 어떡하지? 애써 나비를 못 본 척 눈을 감고 있는데 앞서가던 친구가 “노랑나비다!”라고 소리친다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푸우 내쉬며 나비 뒤를 쫓아갔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6.01
바벨탑 바벨탑 / 이재봉 아이들이 탑을 쌓는다 큰 블록 위에 작은 블록을 작은 블록 위에 큰 블록을 그 위에 다시 작은 블록을 위험스레 한 층 한 층 쌓으며 하늘로 탐욕의 손을 뻗다가 그만 탑이 구름에 걸려 와르르 무너진다 조금만 낮았더라면, 조금만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5.05
세족식 세족식 / 이재봉 서로 발을 씻어주는 행사에서 아내의 발을 처음으로 씻어주었다 발등을 타고 씻어 내려가다가 발바닥을 슬그머니 간질였다 살갗만 닿아도 까무러치던 아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이 발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가기 싫은 곳도 많았을 테고 험한 데도 많았을 텐데, 울퉁불퉁 옹이처럼 불거져 나온 아내의 거친 발을 씻으며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2.04.17
고봉밥 고봉밥 / 이재봉 육남매가 두레상에 둘러앉아 밥 한 그릇을 단숨에 해치운다 학교에 얼른 가야 하는 아이들 밀어 넣는 밥숟갈이 너무 크다 천천히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항상 넘치는 어머니의 고봉밥 어머니에게 고봉밥은 사랑이다 사랑은 넘쳐야 사랑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6.23
창가에서 창가에서 / 이재봉 주여,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과 향기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들을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새떼들을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만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 하늘로 사라지고 하늘에는 금빛 노을이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주여,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는 당신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5.01
풀 한 포기도 풀 한 포기도 / 이재봉 땅 속에 묻혀 있는 민들레가 차가운 벽을 뚫고 다시 나오도록 하나님은 온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한낱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도 이처럼 거듭나게 하시는데 당신의 모습대로 빚은 사람이 땅 속에서 썩도록 내버려두시겠는가 우리를 그냥 놔두시겠는가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마른가지에서 꽃이 다시 피어나듯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 나게 하신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4.01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 이재봉 아프고 나니까 알겠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을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죽는 것은 내일 일이니 오늘 내가 할 일은 시를 쓰는 일 시가 비록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세상의 권력 앞에서 시가 무력해 보일지라도 가슴에 문득 뜨거움을 느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러한 신념을 간직하고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1.01.11
성탄절 오후 성탄절 오후 / 이재봉 눈 내리는 성탄절 오후 명동길을 걸어가는데 은행 앞 공터에 노숙자가 엎드려있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동전을 던졌더니 뗑그렁거리며 언덕 위 첨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이 당신 생일인데도 2000번째 생일인데도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종을 치고 있다 우리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용서하라고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0.12.25
칠석 칠석 / 이재봉 까마귀 떼가 푸드덕 하늘 높이 오르더니 밤새 칠석물이 내린다 빗소리에 잠이 안 와 밤새도록 뒤척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일 년에 단 한번 만나도 수억 광년 끊어지지 않는 저들 사이에는 시공간도 끌어당기는 사랑의 중력이 작용한 것이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20.09.01
탯줄 탯줄 / 이재봉 밤새 잘금거리며 비가 내리더니 어머니가 오셨다 병상에 누운 자식의 손을 붙잡고 울고 계신다 아플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뿌연 사골국물을 입속에 넣어주신다 나는 그만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솟았다 아직도 어머니는 탯줄을 끊지 못하고 저렇게 울고 계신다 제4시집 [지구의 아침]/지독한 사랑 2019.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