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모든것은우연 17

지진

지진 / 이재봉 땅이 이렇게 쉽게 갈라질 줄 몰랐다 집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아내도 자식도 다 떠내려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폐허만 남았다 땅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안락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땅과 집을 제 것인 것처럼 알고 살지만 내가 산 땅이라고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지은 집이라고 내 것이 아니다

명왕성

명왕성 / 이재봉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태양계에서 제외당한 명왕성 ‘난쟁이별 134340’이라고 적힌 새 이름표를 큰 별들이 건들고 지나가자 기울어진 어깨를 더욱 실긋거리며 꽁꽁 언 태양계 끄트머리를 돌고 있다 열한 번째 면접시험을 보는 사내 키가 작은 게 부끄러워 면접실로 들어가자마자 얼른 의자에 앉는, 앞가슴에 ‘응시번호 137번’을 단 사내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말고 의자에 파묻힌 제 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암흑물질은 그리움이다

암흑물질은 그리움이다 / 이재봉 아내와 중미산 천문대를 올라가고 있는데 기러기 떼가 끼룩거리며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 자세히 바라보니 별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를 끌어당기며 날아간다 지구 속의 기러기 우주 속의 별 저들 사이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존재한다 태고의 구름 속에서 별이 되지 못하고 우주를 떠도는 육체가 없는 암흑물질이

인천대교

인천대교 / 이재봉 철탑을 보자 나는 날고 싶었다 다리가 없어지고 공중에 하얀 비탈길이 생겼다 나는 그 길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 는데 브레이크 페달이 보였다 날아가는 자동차에 왜 브 레이크가 필요한지 의아했다 그때마다 또 다른 내가 달 려와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우리 다음 생애에 여기 다시 오면 날아올라요 이 다리를 버리고 저 하얀 비탈길로 새처럼 가볍게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

KTX

KTX / 이재봉 200킬로에서 250킬로로, 250킬로에서 300킬로로 가속 이 붙자 속도에 취한 고속열차가 긴 터널 속으로 빠져 들 어간다 차창 밖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열차 안의 시 간은 느리게 지나간다 터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시 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나의 옛 고목 나무가, 고샅길에서 구슬치기하던 나의 옛 친구들이, 나의 옛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나의 옛 어머니와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