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시집 [사랑풍경]/모노크롬화상 5

모노크롬화상

모노크롬 화상 / 이재봉 그 해 유월 흥철네 아버지는 돼지꿈을 꾸었다 꿈길에서 만난 시커먼 돼지를 따라 기와집골 감자밭으로 갔다 찢어진 밭두렁에서 주둥이가 떨어져 나간 화병을 발 견했다 이장에게 보였더니 백제 후기 것으로 추정된다면 서 횡재했다고 부러워했다 다음 날로 그는 팔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쇠꼴배미 두마지기로 여자를 사고 천수답 백 평 으로 술을 마시고 마지막 남은 텃밭을 노름판에 던졌다 마 누라 자식들이 사흘 동안 물만 마시다 얼굴에 부황기가 가 득할 때 화병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인사동 골동품 거리를 헤매다 화병을 탑골공원에 던져버렸다 그 해 시월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기와집골 감자밭에는 한 주검이 누워 있었다 마시다 남은 농약병이 함께 뒹굴고 있었다

몽타주

몽타주 / 이재봉 희방사로 가는 버스가 연두색 봄바람으로 출렁거렸다 버스가 신갈인터체인지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새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앞 유리창 쪽으로 계속해서 날았지만 그때마다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지곤 했다 옆 창문이 다 열려 있는데도 한결같이 앞쪽으로만 날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새의 안전 탈출을 지켜보았지만 끝내 앞 유리창에 머리가 깨져 신음 소리도 없이 죽고 말았다

스냅

스냅 / 이재봉 오후 네 시 꼬레지오에 있는 그라찌아에게 팩스 를 보내고 찾아온 김사장과 잡담을 나누다 석간 신문을 읽었다 평온했다 여섯 시 어머니 전화를 받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누 워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던 아버지가 산소 마스크를 쓰고 하얗게 누워있었다 귓속에 대고 소리쳐도 대답이 없었다 깊은 잠에 서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꿈속에서 아버지의 아버 지를 만나도록 깨우지 않고 돌아서서 울음을 터뜨 렸다 산자와 죽은자 사이는 눈 깜작할 사이였다

금남로 아리랑

금남로 아리랑 / 이재봉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그 웬수 놈의 오월은 다시 왔는디 폭도가 된 우리 아들은 삼 년 만에 희생자로 숨어 살던 이 내 몸은 피해자로 부르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는디 구청직원 찾아와 보상금 놓고 가네 싫소 싫소 그냥 가져가소 돈은 그만두고 총 쏜 놈이나 잡아 주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그날의 아카시아 꽃은 다시 피었는디 오늘도 금남로 네거리엔 붉은 꽃잎만 뚝 뚝 떨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