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난쟁이별]/시뮬라시옹 16

군중

군중 / 이재봉 누우떼가 우두머리를 따라 마라강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우들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서로 밟혀 다리가 부러져도 다시 벌떡 일어나 강물에 뛰어드는 이유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대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자 누군가 구호를 따라 외치며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광경을 마포대교를 지나가다 보았다

이 순간

이 순간 / 이재봉 대학병원 중환자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여자가 누워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두 다리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누군지 한 사람 달려가고 한 사람 달려왔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산소호흡기로 들어 마신 마지막 공기방울이 눈 속에 동그라니 떠 있다 울음소리와 함께 주검이 영안실로 내려가는데 바로 그때 반대편 신생아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 이재봉 은행 창구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대기표를 잃어버렸다 37번, 37번 손님, 분명 내가 은행원 앞에 서 있는데도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번호만 불렀다 은행에서 나와 서점 앞을 지나가다 책 한 권을 샀다 수표 뒷면에 이름을 쓰고 계산원에게 건 내자 그녀는 내 이름이 있는데도 주민등록번호를 쓰라고 했다 번호가 생각이 안 나 머무적거리는데 문득 맞은편 거울 속에 내가 거기, 아득한 풍경처럼 서 있다